비가 그치던 시간, 주엽에서
야장은 비가 와도 크게 젖지 않았다.
주엽역에서 몇 걸음, 콘크리트 지붕 아래로 들어가 테이블을 손으로 쓱 닦고 앉았다.
문에 붙은 영업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오후 다섯 시부터 새벽 세 시.
살얼음 낀 맥주가 왔다.
잔을 쥐자마자 손끝이 먼저 깨었다.
첫 모금이 목을 지나가며 오늘의 생각들이 차례대로 가라앉았다.
맞은편 테이블에서는 두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주고받았다.
웃음이 번졌다가 금방 잦아들었다.
밤은 그런 식으로 사람 사이를 오가며 속도를 정한다.
짜글이가 끓는 소리를 내며 도착했다.
두부와 김치, 돼지고기가 뚝배기 가장자리로 올라붙었다.
매운 국물 한 숟가락에 말이 조금 쉬워졌다.
바삭한 만두는 한입 크기였다.
채 썬 야채를 올리고 소스를 톡 찍어 넣으면 더 묻지 않고 잘 먹힌다.
작게 나뉜 선택들이 밤을 덜 무겁게 만든다.
감자튀김은 사이사이를 채웠다.
짭조름한 소금이 손끝에 남고, 대화의 빈칸이 자연스럽게 메워졌다.
크게 말하지 않아도 되는 밤이었다.
안쪽 조명은 낮게 깔려 있었다.
목재 보 사이로 직원들이 흔들림 없이 다녔다.
빈 잔이 빠지고, 새 잔이 들어오고, 리듬은 일정했다.
두 번째 잔을 천천히 마셨다.
첫 잔이 풀어준 감정이 정리되고, 생각이 조금 객관적으로 돌아왔다.
오늘 보류한 말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굳이 꺼내진 않았다.
창밖 빗소리가 약해졌다.
필로티 아래 바닥은 젖어 있었지만 테이블 위는 말랐다.
물수건에서 빨래한 냄새가 났고, 그 냄새가 오늘의 결론처럼 느껴졌다.
간판을 올려다봤다.
누구든 이 안에 들어오면 잠시 ‘손님’이 된다.
책임이 가벼워지고, 질문이 줄어들고, 대답이 느슨해진다.
세 번째 잔은 시키지 않았다.
대신 파인애플 샤베트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에는 그걸로 입가심을 해보자고, 마음속으로만 정해두었다.
일어서며 테이블을 한 번 더 쓸었다.
살얼음이 남긴 물자국이 손바닥에 옮겨 붙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온도, 오늘을 버티게 해준 그 중간.
밖으로 나오니 빗방울이 거의 멎어 있었다.
주엽역 불빛이 젖은 바닥을 따라 길을 만들었다.
나는 그 길을 밟아 집 쪽으로 걸었다.
돌아보기 전에 한 번 더 안쪽을 보았다.
테이블마다 다른 이야기가 조금씩 남아 있었다.
누군가의 위로, 누군가의 작별, 누군가의 다음 약속.
문을 닫는 동안, 그곳은 또 다른 밤을 받았을 것이다.
얼음은 다시 얼고, 맥주는 다시 따라지고, 조명은 그대로 낮게 깔렸을 것이다.
오늘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