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이 머무는 층

테이스트파크 6층에서

by 서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초록의 냄새가 먼저 나를 맞았다.

한 층 전체를 얇게 덮는 향, 차가운 유리와 손바닥 사이에서 미끄러지는 물기.

나는 그 층을 지나갈 수 없었다. 잠시라도 이곳에 머물러야 했다.


주말이었다. 사람들은 줄을 섰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휴대폰을 보거나, 서로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거나,

무언가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을 기다리는 얼굴로.


나는 메뉴판을 오래 올려다보았다.

단어들이 선명한 색을 가졌다.

워터, 라떼, 크러쉬.

그리고 코코넛.

낯선 것은 아니지만 오늘의 마음에 맞는지는 쉽사리 판단되지 않았다.


지난여름 끝자락, 그녀가 말했다.

“덜 달게 해 주세요.”

그 말 뒤로 긴 침묵이 붙어 다녔다.

우리의 대화는 조금씩 색이 빠졌고, 남은 것은 초록의 결 같은 것이었다.

쓴맛으로 시작해, 기분 좋게 사라지는.


컵을 건네받는 순간, 물기가 손등을 적셨다.

허공에서 얼음이 천천히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초록이 유리 벽 안에서 더 진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한 모금 마셨다.

혀끝에 도착한 맛이 내게 말했다. 아직 여기 있다고.


맞은편에는 영화관이 있었다.

시간표가 전광판처럼 흐르고, 관람객들은 제각각의 밤으로 들어갔다.

나는 영화표가 없었다. 대신 한 잔을 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동안, 나는 밝은 통로에 서서 초록을 마셨다.

필요한 것은 장면이 아니라 호흡이라는 듯이.


줄이 조금 줄었다. 또 길어졌다.

아이들이 지나가며 초록을 가리켰다.

엄마의 손목이 가벼운 제지가 되어 아이의 손가락을 내려앉혔다.

나는 그 제스처가 이상하게도 부드러워 마음속에 오래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 모금마다 기억이 정리됐다.

너무 오래 붙잡고 있던 문장들이 컵벽에 닿아 금세 식어 버렸다.

나는 그 문장들을 더 이상 데우지 않기로 했다.

식어야 할 것들은 식을 자격이 있었다.


카운터 안쪽에서 누군가가 차를 풀고 있었다.

원형의 그릇, 규칙적으로 젓는 손목,

가까스로 유지되는 질서 같은 것.

그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내 속에서도 뭔가 천천히 가라앉는 듯했다.

어지럽던 생각들이 바닥에 모여 하나의 색을 만들고,

그 위로 맑은 부분이 생겼다.


나는 코코넛을 떠올렸다.

검은 그림자처럼 달려와 초록의 표면에 얇은 그늘을 드리우는 맛.

어떤 날엔 그것이 필요했다.

너무 선명한 것들은 오래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덜 달고 또렷한 것을 택하기로 했다.

감추지 않는 맛. 변명하지 않는 온도.


컵을 반쯤 비웠을 때,

멀리서 음악이 흘렀다.

매장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합주처럼, 서로 다른 노래가 겹쳤다.

사람들의 발끝은 자신의 박자를 들고 움직였다.

나는 그들 중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았고,

그래서 오히려 가벼웠다.


여기서는 이름을 크게 부르지 않는다.

작은 목소리가 가까운 거리를 건너온다.

누군가의 이름, 또 다른 누군가의 이름,

그 사이에 내 이름도 잠깐 머물다 지나간다.

나는 컵을 들고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입구 쪽 유리난간에 기대 서면, 도시가 아래로 열렸다.

철과 유리, 사람과 바람,

그 모든 것 위로 미세한 비늘처럼 초록빛이 흩어졌다.

아마도 내 눈이 그렇게 보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한 모금 더 마셨다.

그 한 모금은 오래된 약속 같았다.

내가 나에게 걸었던 약속.

다시 단정하게 걷겠다는, 원하는 것을 천천히 선택하겠다는,

끝까지 씹고 삼키겠다는.


안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은 롤케이크를 나눠 먹었다.

얇은 포크가 조심스럽게 결을 갈랐다.

그들의 대화를 듣지는 못했지만,

한 조각이 사라질 때마다 둘 사이의 공기가 조금씩 따뜻해지는 것을 보았다.

사라지는 것으로 충만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것을 목격하면, 나는 나의 빈 곳을 덜 두려워하게 된다.


컵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음은 작아져 투명해졌다.

나는 남은 것을 단숨에 마시지 않았다.

끝은 끝의 방식으로 와야 했다.

천천히, 무릎까지 오는 파도처럼.


문득 생각했다.

사람이 하나의 계절을 통과하는 데 필요한 것은

대단한 결심이 아니라 작은 루틴일지도 모른다고.

어느 층의 어느 가게 앞 줄에 서서,

내 이름이 불리면 한 잔을 받아 들고,

제자리에서 호흡을 가다듬는 일.

그렇게 오늘을 마시는 일.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길에 뒤돌아보았다.

초록의 빛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손에도,

아직 오지 않은 누군가의 오후에도.

나는 마침내 마지막 얼음을 삼켰다.

혀끝이 잠깐 저리다가, 곧 고요해졌다.

그 고요 속에서, 오래 미뤄둔 몇 가지를 떠나보냈다.


문이 닫혔다.

층과 층 사이를 내려가는 동안,

내 몸이 조금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유리의 진동, 금속의 숨소리,

모든 것이 나를 바깥으로 밀어 올렸다.

나는 알고 있었다.

다음에 이곳을 지나칠 때도

나는 또 멈출 거라는 것을.


줄이 있으면 줄을 설 것이고,

내 이름이 불리면 대답할 것이며,

초록이 내 안에서 가라앉아 맑아질 때까지

잠깐, 아주 잠깐 머무를 거라는 것을.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이 각자의 속도로 흩어졌다.

나는 내 속도를 찾았다.

멈춤과 진행 사이,

한 잔의 끝과 하루의 시작 사이.

그 경계 위에 서서,

나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나를 다 마셨다고,

나직하게 중얼거리면서.



사진출처 : 슈퍼말차 용산아이파크몰, CGV 동선에 붙은 진한 말차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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