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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bricolage Feb 16. 2023

듀엣 7

단조와 이저

듀엣

duet



[d]azzling stranger

[u]nforgettable moments

[e]xtraordinary people

[t]one and hope



tone and hope



https://youtu.be/MYrXK5ek_PQ



(7)

"방학 숙제야?"


 꽃잔디가 무성한 화단 앞에 쪼그려 앉은 단조는 벌써 한 시간째 크레파스를 만지고 있었다. 기다란 호스로 잔디에 물을 주던 이모는 오며가며 그림을 구경했다. 조그마한 손으로 도화지를 채우는 모습이 초등학생치고 예사롭지 않았다. 복사 붙여 넣기 하듯 옮겨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단조와 가까운 자리에 풍성히 자란 맥문동 꽃이 있었다. 어떤 색을 고를지 고민하는 단조 뒤로 슬쩍 다가가니 그가 이모를 올려다봤다. 단조는 기다랗고 삐쭉삐쭉한 풀잎을 불규칙한 초록빛 파도로, 하늘로 솟은 보랏빛 꽃대를 해면 위의 신비로운 일몰로 해석했다.


"단조 너. 나중에 이모도 그려준다고 약속해."

"이모 얼굴?"

"응. 싫어? 이렇게 재밌는데?"

"이모는 표정이 다양해서 좋아."

"고마워. 너도 그래."

"아냐. 애들이 그러던데…. 맨날 웃기만 한대요."

"넌 네가 얼마나 다양한 표정을 가지고 있는지 모를 거야. 찡그린 표정, 배부른 표정, 졸린 표정, 삐진 표정, 행복한 표정."

"이모는 어떻게 알아요?"

"단조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랑 같아."


 이모는 구불구불 이어진 호스를 팔에 감아올렸다. 크레파스를 제자리에 끼워넣던 단조가 궁금한 게 있는 듯 이모를 불렀다.


"근데 이모. 이건 죽었어?"


 얼룩덜룩 크레파스가 묻은 손가락이 나팔꽃을 콕 건드렸다. 얄쌍한 전구처럼 꽃잎을 말고 있는 모양새였다.


"살아 있어. 이게 '나팔꽃'이라는 건데 아침에 피는 꽃이야."

"그럼 죽은 게 아니라 자는 거예요?"

"맞아~ 낮잠 자고 있어."

"근데 꽃이면 계속 피어 있어야 꽃 아닌가."

"꽃도 성격마다 달라. 음, 나팔꽃은 지혜로운 거지."

"왜?"

"가장 빛날 수 있는 순간을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컴컴한 밤도 두렵지 않지.




 달빛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저녁. 단조는 종종 걸음으로 담벼락 가까이 다가갔다. 우거진 덩굴 사이를 헤집고 럭키가 있을 만한 곳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예상이 틀렸을 수는 있지만 왠지 럭키라면 아직 집을 떠나지 않았으리라는 믿음이 더 컸다.


 서로 엉겨붙은 잎들을 커튼처럼 열어젖히고 뒷공간을 확인한 지 얼마 안됐을 무렵이었다.


"럭키야."


 덩굴의 깊숙한 구석 어딘가,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공간에 럭키가 있었다. 보라색으로 빛나지도, 오팔처럼 반짝이지도 않았지만, 뽀얀 달처럼 신비로운 자태를 보이고 있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단조는 덩굴을 얌전히 덮어주었다. 럭키가 저 자리에서 쉬고 싶다면 그렇게 둬야 맞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럭키는 떠나야 했다. 돌아가야 할 곳이 있었으니까. 98년의 피추동도, 23년의 지구도 아닌, 머나먼 우주 어딘가로.




 10분이면 빠져나갈 거리를 20분 내내 기다리는 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익숙하지가 않았다. 그의 답답한 심정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라디오에서 이저가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마저도 광고 시간이 되자 얄짤없이 쏙 들어갔다. 세뇌하듯 귀에 꽂히는 CM송을 따라 흥얼거리던 이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 사회인이 제일 좋아하는 요일이 언제게요.


 단조의 목소리가 차량 내부를 울렸다.


"요일보다 방학을 원하지 않나. 봄여름가을겨울방학."

- 맞아맞아. 그리고 포상 휴가는 별도여야 돼요. 알죠.

"알죠알죠. 근데 정답이 뭔데요?"

- 정답은 월요일.

"사악하다."

- 뭐라고요?

"사람답다고요."


 그의 변명에 단조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 감기 다 나았어요."

- 다행이다. 이제 저희 집 놀러오셔도 돼요.

"너무해. 정 없는 건 단조 씨 아니에요?"

- 그니까 아프지 말라고요. 근데요, 이저 씨.

"네."


 그의 말을 기다리는 이저의 손가락이 핸들을 톡톡, 건드렸다. 침묵이 길어지니 어떤 말이 나올까 궁금했다.


- 럭키 찾았어요.


 초록불로 신호가 바뀌듯 이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 그러니까 월요일이어도, 아무리 피곤해도, 오늘 우리는 만나야 해요.




 해가 빨리 지는 산동네의 특징을 간과한 탓일까. 산을 오르기 전만 해도 짱짱하던 햇살이 산길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우는 게 느껴졌다. 나무 계단을 오르는 네 개의 다리가 얕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빨라졌다.


 정시 출근은 있어도 정시 퇴근이랄 게 없는 이저는 평소보다 신경써서 일찍 마을로 돌아왔다. 거의 닷새만에 마주한 단조는 이전보다 긴장이 많이 풀어진 얼굴이었다. 마음가짐의 변화인지 몸의 적응인지는 몰라도 한결 가벼워 보여 다행이었다.


 쉬지 않고 산을 오르던 중 널찍한 바위가 드러나자 둘은 잠시 앉았다가 가기로 했다. 단조가 소중히 품에 안고 온 틴케이스를 옆에 내려놨다. 이저가 그에게 물을 건넸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단조는 목을 축였다. 차가운 물이 뜨거운 목구멍 뒤로 넘어가는 게 또렷하게 전해졌다.


"이제 정말 여름도 끝물인가 봐요. 바람이 차요."


 높고 곧게 뻗은 나무 기둥을 올려다보던 이저가 나지막이 말했다.


"무릎 시린 거 아니죠?"

"…."

"왜 그렇게 봐요. 방금 속으로 제 욕했죠."

"티 나요?"


 털털하게 웃어넘기는 두 사람의 어깨가 비슷한 움직임으로 들썩거렸다. 빼곡한 나뭇잎 사이로 구름이 빠르게 지나갔다.


"저는요. 산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게 있거든요."

"뭔데요?"

"시끄러운데 조화롭다. 새소리, 나뭇잎 소리, 돌 굴러가는 소리, 짐승 소리, 각자 다른 소리를 내는데 멀리서 보면 하나의 산이잖아요."


 이저도 공감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단조는 틴케이스를 바라봤다. 회전목마 그림이 양각으로 표현된 틴케이스 아래에는 오르골이 있었다. 케이스 밑을 돌리면 동화 같은 오르골 음악이 흘러나왔다. 물방울이 번지듯 마음을 일렁이게 만드는 멜로디가 고요하게 울려퍼졌다.


"저는 왜 럭키가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만 생각했을까요."

"…."

"마을을 헤집고, 지구를 어지럽히고."

"영화처럼요?"

"네. 그래서 결국에는 인간을 곤란하게 만들면 어쩌지 싶었어요."

"그럴 만해요. 첫날 요란했잖아요. 뒤집어엎고, 쓰러트리고, 어지럽히고."

"장관이었죠."


 회상하느라 조용해진 단조 앞으로 클로버 모양의 팬던트가 건네졌다. 이게 뭐냐는 듯 단조가 눈썹을 들어올리자 이저는 대뜸 가지세요, 했다.


"뇌물이에요?"

"저번에 제주도 여행하면서 산 거예요. 딱히 살 생각은 없었는데 그날은 이게 제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여행 내내 가지고 다녔는데 하루하루가 괜찮았어요."

"…."

"제 위안이에요. 가져요."


 앉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 이저가 정상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갔다. 그가 했던 말이 한동안 귓가를 맴돌았다. 단조는 틴케이스를 품에 안고 이저가 준 팬던트를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왜인지 조금은 웃음이 났다.


 정상에 가까워지자 바람이 거세졌다. 단조와 이저는 몸을 움츠리면서도 꿋꿋하게 바람을 밀어냈다. 예상한 대로 정상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있던 사람들도 다들 하산하려는지 분주했다. 단조와 이저는 등산객을 위한 전망대에 올랐다. 탁 트인 해방감이 몸속 깊은 곳을 두드렸다. 낙조의 기미가 보이는 하늘은 유화 같았다. 이제는 보내줘야 했다.


"어떻게 풀어줘야 할까요. 뚜껑 열고 쏟아야 하나? 아니면 손으로 직접 꺼내서?"


 때가 다가오자 살짝 긴장한 탓인지 단조가 고민을 늘어놨다. 안절부절 못하는 그의 어깨가 이저에게 붙잡혔다.


"열어주기만 해도 충분할 거예요."


 차분한 이저의 목소리에 단조는 결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살며시 틴케이스 뚜껑을 열었다. 럭키가 얌전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자기를 가두던 뚜껑이 사라지자 럭키는 마치 기지개를 펴는 듯 몸을 부풀렸다. 그리고 바람결에 두둥실 떠올랐다. 럭키는 느리게 느리게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저만 아쉬운 거 아니죠?"


 이저도 그런가 싶어서 물었는데, 이미 그는 팔뚝으로 눈물을 훔치는 중이었다. 단조는 실소를 참지 못했다. 그새 정이 들었던 그는 괜스레 마음이 울렁거렸다. 시공간이 겹치고, 청소하고, 역정만 내다가 시간이 갔는데 막상 떠나보내려니 허무했다.


"잘 가!"


 단조는 이저의 팔을 움켜잡고서 하늘로 무지개를 그렸다. 좌우로 왔다갔다 일곱 번의 인사를 건넸다.


"언제든지 놀러 와도 돼!"


 지구의 강인함에 비하면 한없이 작고 연약한 두 사람. 그들은 빛을 내며 작아지는 점을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헤어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야트막한 정상 아래로 마을의 전경이 담겼다. 석양이 비추는 세상은 썩 괜찮았다.

 깜빡이는 우리가 아주 작은 점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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