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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ri Lee Mar 29. 2020

알고 먹자, 숙주나물

숙주나물 이름의 유래와 서민 문화 예찬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나중에 미국에서 아이를 낳아 키울 때 내 아이들도 본인들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본인들의 뿌리에 대해 관심을 갖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미국에서는 따로 한국사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에 미국에서 나고 자랄 우리 아이들의 역사 공부에는 나와 신랑의 역할이 전적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 아이들과 공유하고 싶은데, 강제로 주입해서 아이들이 이른 나이에 한국사에 거부감이 들면 어쩌지? 걱정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미국에서 자라게 될 내 아이들에게 거부감 없이 한국사에 대한 흥미를 심어 줄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실험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험 대상은 구 남친 현 남편, 내 신랑이었다. 

2년 전부터 나는 집안일을 하거나 씻을 때면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명곡을 틀어댔다. 처음엔 내가 하도 틀으니까 신랑은 “그래서 이거 언제까지 들을 거야?” 하다가 나중엔 자기도 모르게 운전을 하면서 흥얼흥얼 거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평소 내가 다른 예능을 볼 때는 “뭐 봐 뭐 봐~” 하면서 쪼르륵 내 옆에 자석처럼 달라붙는 신랑이 내가 역사물을 볼 땐, “재미있게 봐~”하고 유유히 사라지곤 했었는데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단군할아버지가~~ (흥얼흥얼), 어! 영조대왕 신문고 다음에 뭐였지? 빨리 찾아봐”하는 엄청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너무너무 기뻤지만 대놓고 내가 너무 난리를 치면 괜히 쑥스러워할까 봐 크게 반응하지 않고 나는 차분하게 

정조 규장각~”하면서 남편의 완곡 암기를 도왔다. 


신랑이 드디어 100명을 다 외우고 난 이후엔 어느 순간부터 “근데 혜초 천축국이 뭐야?” 혹은 “아니 역사를 빛낸 100명의 위인인데 여기에 왜 이완용 이름이 들어가?” 하는 등 굉장히 날카롭고 기특한 질문들을 퍼부었다. 그러기를 반복하다가 이제는 나보다 더 암기를 잘하며 나중에 회사에서 장기자랑 같은 거 하게 되면 이 곡을 완창을 하겠다는 아주아주 예쁜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우리는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이 곡부터 암기시키자는 합의에 이르렀다. 

칭찬해 우리 신랑

그러다가 며칠 전에 남편이 “근데 왜 신숙주와 한명회 역사는 안다~이래? 왜 신숙주와 한명회는 뭘 했는지 정확히 안 말해줘?” 하는 질문을 했다.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어렴풋이 신숙주가 변절자이고 한명회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세조 시절 엄청난 권세가라는 것을 알았지만, 남편의 말대로 가사가 너무 두루뭉술했다… 

왜 이렇게 썼지? 하면서 “잠깐만, 세수만 마무리하고 얼른 찾아볼게” 해서 나는 그때부터 신숙주에 대해 파보기 시작했다. 


가사를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 신숙주의 입체적인 모습, 그리고 이와 얽힌 음식 이름에 관한 유래를 이번 편에 다뤄 볼 것이다. 


신숙주는 세종의 사랑을 받고서도 세종의 유언을 지키지 않은 변절의 아이콘으로 역사 속에서 평가된다. 

나 또한 신숙주를 세종의 금지옥엽 손자 단종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을 한 파렴치한 인물로 기억했다. 

그러나 역사는 입체적이 듯 여러 면에서 이 인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사육신 성삼문과 박팽년은 단종의 할아버지 세종 때의 대표적인 집현전 학자이다. 

이들과 동문수학을 했던 인물 중에는 신숙주가 있다. 세종대왕은 본인이 죽기 전에 어린 손자 단종을 신숙주와 성삼문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성삼문과 신숙주의 선택은 달랐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scene은 성삼문이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발각되어 끌려와 고문을 받던 중 수양대군 쪽에 서있던 신숙주를 향해 

“너는 집현전 달밤에 세종께서 원손(단종)을 안으신 채 하교하신 일을 생각하지 않느냐!” 

하며 소리쳤다고 한다. 

나는 이 순간 신숙주의 표정이 정말 궁금하다. 


과거에는 한 길을 가던 조선 당대 최고의 인재들의 운명이 이렇게 첨예하게 갈리게 된 이유가 궁금해졌다. 


신숙주는 세조의 남자이기 이전에 세종의 남자였다.


신숙주는 원래 타고난 똑똑이였다. 어쩌면 너무 똑똑했기에 실리에 밝았고, 그래서 나중에는 역사에게 두고두고 심판받게 될 선택을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신숙주가 세조의 편에 섰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수양대군(이후 세조)은 똑똑했지만 사리에 지나치게 밝았던 신숙주를 이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수양대군은 자신의 집 앞을 지나가던 신숙주를 보고 불러들였다. 수양은 아버지 세종과 형 문종이 국정을 살피는 동안 명나라 사신으로 오고 가며 조선의 외교에 힘을 썼던 세종이 아주 믿고 의지했던 듬직한 둘째 아들이었다. 신숙주를 불러들인 그 시점도 수양대군이 곧 명나라 사신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명나라 사신단의 리더나 마찬가지였던 수양은 신숙주를 자신의 명나라 사신단에 포함시켰다. 어쩌면 이번 기회를 통해 오랜 기간 가까이 지내며 신숙주를 자신의 측근으로 포섭하려던 수양의 치밀한 계획이 아니었을까 싶다. 


수양과 가까이 지내며 어쩌면 신숙주는 아직 어린 단종과 이미 검증된 리더 수양의 모습을 자신도 모르게 비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13세, 오늘날로 하면 초등학교 6학년 나이의 단종. 그리고 어머니 현덕왕후 권 씨는 이미 사망한 지 오래라 단종을 보필해줄 후견인도 마땅히 없는 상황. 아버지 문종도 능력은 있었지만 허약한 탓에 일찍 사망하였고, 할아버지 세종도 승하하고, 혈혈단신 단종에게는 김종서와 같은 노회 한 대신들의 입김만 있을 뿐이었다. 


반면 37세의 수양대군은 세종의 첫째는 아니지만 둘째 아들로서 아버지와 형의 국정 운영을 도우며 이미 세상 돌아가는 섭리를 누구보다 잘 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신숙주는 세조에게서 세종의 모습을 보았을 수도 있다. 

세조는 실제로 세종 때의 정책들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세조의 대표적인 업적은 조선의 법전 경국대전 편찬을 실시하였고, 세종 때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 직전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하면서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하였다. 직전법을 실시하면서 가장 많이 피해를 본 사람들은 대신들이기에 (어느 시대나 있는 자들이 더함) 신하들의 반대가 엄청났다. 


그러나, 세조 아닌가! (영화 “관상”에 나온 이정재의 첫 등장을 떠올려보길) 

불만을 표했지만 감히 세조 앞에서 누구 하나 강하게 반대하지는 못했으리라. 

이러한 파격적인 공법과 국가의 대대적 개혁 작업은 세조였기 때문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신숙주는 세조의 모습 속에서 세종을 보았고, 세조여야만 세종과 문종의 빈자리를 큰 흔들림 없이 채우고 조선을 이끌어 갈 수 있다고 판단이 들었나 보다. 신숙주는 세조의 남자가 되리라 마음을 먹었다. 


세조의 옆에 서기로 결정한 신숙주는 세조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세조의 정책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이에 대한 답례로 신숙주는 우의정, 영의정이 되면서 세조 집권 시기 4번이나 공신으로 책봉이 되었다.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면서 과거 자신의 벗 성삼문과 박팽년이 죽는 와중에도 이러한 역모의 싹을 잘라 버리기 위해선 단종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세조에게 청했던 이가 바로 신숙주다. 피도 눈물도 의리도 절개도 없지만, 본인의 입신양명에는 기막히게 밝았던 사람이라 본인은 세조의 왕위 즉위와 함께 말 그대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역사의 평가, 그리고 숙주나물


신숙주 본인은 일생이 편했고 본인의 선택에 스스로 만족하면서 살았을지 모르겠지만 백성들의, 그리고 역사의 평가는 냉정했다. 


집현전 학자 시절 신숙주가 밤새 공부를 하다가 깜빡 잠이 든 모습을 보고 측은 했던 세종은 신숙주에게 본인의 용포까지 덮어주면서 애정하고 믿었는데, 오히려 단종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육신들을 죽게 하는데 앞장선 신숙주가 백성들은 너무 미웠나 보다. 


차마 신숙주를 직접 두들겨 팰 수는 없고… 분풀이는 해야겠고… 하다가 탄생한 게 “숙주나물”이다. 

원래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던 숙주나물의 이름은 녹두나물이었다. “숙주나물”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이다. 


녹두나물(이후 숙주나물)은 처음에 딱 수확했을 때는 하얗고 싱싱하다. 그러나 하루만 지나면 누리끼리 해지고 흐물흐물해져 생명력을 픽 잃어버리고 만다. 이렇게 하루만 지나면 맛탱이가 가버리는 모습이 마치 신숙주의 절개 같다고 하여 이때부터 백성들은 이 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개명했다. 

 

또 숙주나물로 만두소를 많이 만들어 먹었는데 이때 만두소를 만들려면 숙주나물을 짓이겨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신숙주를 실제로 짓이길 순 없으니) 이 나물을 신숙주라 생각하고 힘껏 짓이겨 먹었던 것 같다. 만약 나도 당시 조선의 서민 아낙네였다면 내 손목 힘줄 터져라 숙주나물을 짓이겼을 것 같다. 

숙주나물을 짓이겨 만들어본 만두

숙주나물 이름의 유래를 알아보는 것도 너무 재미있었지만, 난 조선시대 서민들의 풍자와 해학에 빠져버렸다. 화는 나고 이 화를 풀고 싶은데 마땅한 방법이 없으니까 자신들이 흔히 먹고 접할 수 있는 음식에다 이름을 붙이고 힘껏 짓이겨 요리를 했다는 게 정말 센스가 넘치고 엄지 엄지 척해주고 싶다. 

 

개인적으로 역사 속 힘 있는 자들의 생활 상을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서민 문화를 들여다보는 게 훨씬 더 흥미롭다. 표출하고 싶은데 표출할 방법이 없고 힘든데 참아야 할 수밖에 없었던 억압된 시대를 살던 우리 선조들은 시대에 순응하고 굴복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화와 울분을 표출할 방법을 찾고 그것들을 모아 다채로운 서민 문화를 꽃피웠다는 게 정말 존경스럽고, 그 마음이 참 슬프고도 통쾌해서 서민 문화를 공부할 땐 정말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다. 
 

오늘은 이렇게 숙주나물 이름의 유래로 시작해 이도리의 서민 문화 예찬으로 끝이 났다

다음 편에는 인절미와 도루묵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이번 주말 숙주나물로 만두소 만들어보는 게 어떠실지...?



간판 사진 thanks to 나의 벗 신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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