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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ri Lee Mar 29. 2020

“이 떡의 이름은 무엇이냐”

인절미에 얽힌 역사

평소 떡을 즐겨 먹진 않지만, 떡을 보면 괜히 들뜨고 그런다. 

어릴 적 떡을 먹는 날은 대개 명절이나 잔칫날과 같은 집에 좋은 일이 있을 때여서 “떡 먹는 날”은 “좋은 날”하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뭐 떡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들뜬 분위기가 좋아 떡을 먹고는 했었다. 


그런데 궁금했다. 보통 떡의 이름을 보면, 꿀떡, 무지개떡, 시루떡, 콩떡 등 떡의 모양이나 재료를 따서 이름을 붙여서 보통 “아 이건 꿀이 들어서 꿀떡이구나” 아님 “아 이건 무지개처럼 생겨서 무지개떡이구나” 하고 납득이 갔다. 심지어 백설기도 이름에 “떡”은 없지만, “아 하얀색이라 백설기구나”하며 그 이름에 납득을 했다. 

그런데 유독 거슬리던 떡이 인절미다. 


콩고물이 붙어있는 이 떡은 콩고물떡 혹은 먹을 때 가루가 후두둑 떨어져 가루떡과 같이 납득할 만한 이름이 아니라 이름 어디에도 “떡”자가 없는…뭐야 이 떡...


내가 만약 한국말은 배우는 외국인이라면 처음 “인절미”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그게 뭐지 전혀 감이 안 잡히는…아 쌀 이름인가?” 할 정도로 떡과 그 이름을 메칭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인절미가 왜 인절미인지 알아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외국인 친구가, 

“오, 와이스 디쓰 인절뮈? 낫 썸띵썸띵 떡?” 했을 때 대답을 제대로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늘 내 메거진 속 글들이 그러하듯, 인절미의 이름 유래를 알기 위해서는 그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시작은 이괄의 난이었다. 인조반정과 정묘호란 사이에 이괄의 난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에 이괄의 난에 대해서 익히 들어본 이도 있을 것이고 나처럼 “이름이 괄이야? 뭐 이래?” 하며 처음 들어본 이도 있을 것이다.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을 해보려 노력하겠다. 




광해군의 폭정에 당시 서인들은 (쉽게 생각해서 광해군을 끌어내리고 싶어 하는 야당 정도로 해두자) 인목대비 유폐와 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것 그리고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명분으로 기어코 광해군을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인조를 앉혔다. 그것이 인조반정이었다. 


고려 건국 때도 그러했고 조선 건국 때도 그러했듯 쿠데타를 일으켜 일단 왕좌에 앉고 나면 그간 나를 도왔던 이들을 “개국공신”이라고 추켜세우고 이들에게 아쉽지 않게 한 자리씩 주고 양손 무겁게 그득그득 챙겨주던 게 역사 속 인지상정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양손 무거울 준비를 하고 있던 이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이괄이었다. 


인조 옆에서 인조반정을 위해 애썼던 이괄은 반정이 성공하자 자신에게도 콩고물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인조는 이괄의 마음이 흡족할 정도로 이괄을 챙기지 못했다.


인조가 왕좌에 앉았을 때는, 붕당 정치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또한 당시 명나라를 아비의 나라라고 모시고 있었던 조선 입장에선 명나라의 왕위 인정이 굉장히 중요했다. 

그런 명이 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으니, 인조의 입장에선 굉장히 불안했을 것이다. 명분이 약했던 반정이고 명의 인정을 못 받은 왕이라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선 반대 세력을 숙청해야 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기찰 정치다. 


기찰 정치라는 것은 쉽게 말해 공작정치다. 즉 의심 가는 인물, 인조에게 불만을 품은 인물, 혹시 나중에 역모를 꾀할 인물들을 지속적으로 감시하다가 위험해질 것 같으면 바로 제거해버리는 그런 정치다. 

기찰 정치를 통해서라도 인조는 왕권을 지켜야 했을 만큼 당시 왕권이 많이 약했던 것 같다.


이때 기찰을 담당하던 자가 이괄이다. 그러나 이괄에게도 적이 있었고, 이괄이 기찰 책임자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 정권에서 밀려나 오히려 이괄이 기찰을 받게 되는 대상자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괄은 중앙이랑 아주 멀리 떨어진 평안도 부원수로 발령이 났다. 


이괄의 입장에선 아주 돌아버렸을 것이다. 

아니, 기껏 도와서 왕 만들어 놨더니, 중앙에 두고 이것저것 챙겨주고 거한 자리 하나 줄 생각은 안 하고, 나를 평안도로 좌천을 해!? 하며 땅을 쳤을 이괄이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인조의 진심은 그게 아니었다. 이괄을 너무 믿었고 가장 신뢰했던 장수였기에 평안도로 보낸 것이다. 

당시 조선은 날로 세력이 강해지는 후금 때문에 불안했다. 평안도 지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후금을 막기 위해선 평안도를 지키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 평안도 변방을 지키는 것은 조선을 지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러한 중요한 국경지역에 인조는 본인이 가장 아끼고 신뢰하는 장수 이괄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이괄은 이미 인조에게 서운할 대로 서운했다. 

‘반정 당일 임시 대장까지 했던 나를 1등 공신이 아닌 2등 공신으로 한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이 춥고 먼 평안도까지 보내다니…아 난 토사구팽 당한 거구나…’하고 생각했을 법하다. 


그러나 이괄은 끝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변방의 경비와 군사 훈련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이괄을 싫어하던 세력들이 이괄의 군사 훈련을 역모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몰아 당장 이괄과 그의 외아들 이준을 잡아들여야 한다고 인조에게 고래고래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괄을 끝까지 믿었던 인조는 차마 우리 괄이를 끌고 올 수는 없고, “그래, 그럼 그의 아들만 데리고 오너라” 했단다. 결국 인조의 디팬스(?)로 이괄 말고 아들을 대신 압송하기로 결정을 하고 중앙에서 평안도로 군을 보냈다. 


아니, 아직 자식이 없는 나로서도 내 자식, 그것도 외아들을 끌고 간다고 했을 때 분노했을 이괄이 너무 이해가 간다. “아 제 목숨만이라도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할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오히려 “차라리 날 잡아가시오! 우리 아이는 건드리지 마시오!” 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을까? 


인조는 무슨 생각으로 “괄이는 두고 아들만 데려와” 했는지 모르겠지만, 진짜 화를 자초한 것이다. 당연 죄 없는 아들을 잡으러 온다는 소리에 안 그래도 억울해 죽을 뻔했던 이괄은 눈이 돌아갔을 것이다. 그래서 이괄은 변방을 지켜야 할 군사들을 대비시켰고, 아들 이전을 잡으러 온 의금부 도사와 선전관을 모조리 죽여 시신을 불태우기까지 하였다. 


내가 볼 땐 이건 가만히 있던 이괄을 불쏘시개로 들쑤셔서 중앙에서 오히려 화를 자초한 것 같다. 무튼 자식 가지고 장난치려 했던 중앙에 꼭지가 돌을 대로 돌아버린 이괄은 이 참에 조정 쓸어버리자 해서 반란군을 이끌고 중앙으로 내려오기 시작했고, 그 기세가 너무 세고 속도가 빨라서 오히려 관군이 반란군의 뒤를 쫓아 내려가야 하는 어이없는 형세가 펼쳐졌다. 반란군이 도성을 점령했던 일은 조선사에서 이괄의 난이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얼른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이괄을 진정시키는 협상을 시도 하든 강력한 군을 보내 한 번에 집압을 하든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대책을 간구해야 했을 텐데, 오히려 인조는 반란군의 진압보다 이괄의 친인척과 공모자들을 색출하는 즉결심판을 우선했다. 인조는 광분한 이괄의 더욱 부추긴 거다. 


(하… 인조…. 인조 공부할 때 참을 인을 생각하라고 해서 인조인것인가…) 


이괄의 세력이 거침없이 내려오니까 더는 중앙에 있다간 이괄에게 딱 잡히기 좋으니 인조는 부랴부랴 남쪽으로 도망을 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공주다. 




인조와 인절미


공주에서 피란 생활을 하던 인조는 지역 특산물로 올라온 떡을 먹고 이름을 물었다고 한다. 

이 부분을 보고 들었던 생각이, 

‘백성들은 참 힘들었겠다’  

‘이 와중에 지역 특산물을 먹다니… 관광하러 왔나? 떡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 이 인조 XX야!’

라는 마음속에서 한탄과 화가 뒤섞였다. 


공주 백성들은 갑자기 피란 온 인조가 굉장히 불편했을 것 같다. 안 그래도 자기들도 먹고살기 힘들고 이괄의 난이다 뭐다 위에서 난리가 나서 걱정돼 죽겠는데 임금이란 자가 중앙에서 딱 이렇다 할 해결책은 안 내놓고 여기까지 와서 지역 특산물이나 해 처먹고 있으니 참 갑갑했을 것 같다. 


자자 흥분을 가라 앉히고, 다시


공주에서 맛 본 떡이 맛있었는지 인조는 신하들에게 “이 떡의 이름은 무엇이냐” 하고 물었는데, 떡 이름을 모르던 신하들은 “임씨네 집에서 만든 떡이옵니다.”라고 했나 보다. 

그 떡이 맛있었는지 (인조 멘탈 하나는 인정), “참 절미(더없이 맛있다)로구나” 해서 붙여진 게 ‘임씨네 집에서 만들어진 더없이 맛있는 떡’해서 임절미가 된 것이다. 

백성들 사이에서 임절미 임절미 임절미 이렇게 불리다가 더 발음하기가 편한 인절미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의 역사를 배우면 속 안에서 뜨거운 게 확 올라오게 하는 왕들이 몇 분 계신데, 인조, 선조, 고종이 대표적이다. 인조의 말년을 보면 정묘호란을 겪고 또 병자호란을 겪으며 삼전도의 굴욕을 겪는 걸 보면 또 마음이 짠해지기도 하는데 본인의 안위를 백성들보다 우선시했던 힘없고 무능한 왕들을 보면 정말 화가 솟구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우리 역사를 보면 무책임하고 자신밖에 모르던 지도자들이 어지러 놓은 나라로 인해 항상 피해 본 것도 백성이고, 이때마다 그래도 나라 지키려 수습하고 애쓴 것도 백성이다.


어쨌거나 이괄의 난으로 피란을 가던 인조가 공주에 도착해 임씨네 집에서 맛있는 떡을 먹고 탄생한 게 인절미의 유래다. 


그러나 이괄의 난이 탄생시킨 것은 인절미뿐이 아니다. 

이괄이 변방을 지키던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중앙으로 내려오는 바람에 북방 경계가 비어 버리고 (welcome 후금), 이중 이괄과 함께 난을 일으키던 한윤이라는 자가 후금으로 탈출해서 “조선에선 지금 후금을 치자는 북벌론이 인기를 얻고 있지요~”하며 후금을 자극했고, 이렇게 발생된 게 정묘호란이다. 이때 한윤은 후금의 앞잡이가 되어 후금을 등에 업고 조선에 쳐들어 온다. 이괄의 난은 인절미뿐 아니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탄생시킨 조선시대의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다.  



다음은 도루묵에 얽힌 역사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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