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ori Lee Mar 30. 2020

술 권하는 선조

맥주 한 두어 개는 준비하고 읽읍시다

직장 상사로 만나면 퇴사각인 유형을 꼽아봤다. 

1.     내가 언제? 형: 어제 한 말과 오늘 한 말이 다르다. 내 머릿속에 지우개가 50개쯤은 있는 상사

2.     내가  오늘 좀 컨디션이 안 좋아서 형: 온갖 핑계로 본인의 일을 부하 직원들에게 떠 맡기는 상사

3.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형: 본인보다 능력 뛰어난 부하 직원을 질투해 어떻게든 본인의 회사 

짬밥으로 깔아뭉개려는 상사

4.     사회생활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형: 대접받을 줄만 알지 본인은 아랫사람 위해 줄 줄 모르는 상사 


이 외에도 수없이 많지만 나열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려 이쯤으로 해두겠다. 


최근 퇴사를 한 입장에서 이 리스트를 작성하다 보니 자꾸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 맥주캔을 땄다. 

짧게나마 직장 생활을 하면서 만난 상사가 위와 같은 유형이라 속으로 “이런 선조 같은 새끼”하고 욕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제 내린 업무 지시와 오늘 회의 때 말하는 내용이 달라, “어, 어제 그렇게 지시 안 하셨는데..” 하면 “내가? 언제?” 하고 내일 가면 또, “내가? 언제?”라고 면박을 주기에 급기야 나중에는 처음 파일을 edit 하는 대신 아예 여러 버전을 만들어 놓고 그날 상사의 기분에 따라 파일을 골라 보여주는 돌려 막기 경지에 이르렀다. 또한 상사는 댈 핑계가 없어 “어젯밤 악몽을 꾼 관계로 오늘은 일 할 기분이 아니야”라는 이메일과 본인의 일을 첨부파일로 보내서 나는 영어로 '악몽을 꾸다'가 내가 아는 그 뜻이 맞는지 아니면 내가 이해 못하는 엄청난 뜻이 있는 영어 관용구인데 내가 모르는 건가 해서 한참 '영어 관용구'를 검색해 본 경험이 있다. 뿐만 아니라 기껏 야근해서 작성한 리포트나 성과를 본인이 한 것 마냥 제출하고, 인턴들에게는 왜 버블티를 사주며 왜 자기는 안 사주냐 (니는 나한테 사준적 있냐? 이 상사 새끼야)라는 등의 나열하기도 벅찬 수많은 일화를 탄생시켜준 심사가 매우 뒤틀린 상사 때문에 나는 회사를 퇴장했다.    

 

나야 뭐 퇴사를 하고 당분간 조금 지갑이 가벼운 상태로 살면 그만이지만, 과거 조선시대 때는 상사가 선조 같은 인간이고 내가 그의 관료라면, 이건 뭐 퇴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헬조선이겠구나…싶었다. 




조선 제14대 왕 선조는 정말 최악의 상사 요건을 빠짐없이 다 갖추셨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왜군이 조총을 가지고 파죽지세로 조선에 들어오자,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가장 멀리 떨어진 의주로 몽진(피란과 같은 의미. 왕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간다는 뜻)을 갈 채비를 했다. 피란 길에 백성들이 ‘아이고 왕이 도성을 버리고 떠나면 나라는 누가 지켜요’하며 울부짖자 이들을 향해 자신은 여기서 뼈를 묻을 각오로 싸우고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고 하고 의주로 줄행랑을 쳤다.  


선조의 피란 길 중에 생긴 지명이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친근한 판문점이 그것이다. 선조가 몽진을 가던 중 오늘날의 판문점 위치에서 발이 묶였다. 물길 때문에 피란 길이 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을 동동거리고 있으니까 또 우리 백성들이 (하…….. 맥주 꿀꺽) 나라 버리고 지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는 인간도 왕이라고 자기네들 문짝을 하나씩 떼어서 (또 꿀꺽) 선조 지나가라고 다리를 만들어줬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널문리고 그게 훗날 판문점이 된 것이다.

  

최소한 양심이 있고 백성을 조금이라도 의식을 하는 왕이라면, 백성들이 슬픈 낯빛으로 초가집 문짝을 하나씩 떼 오는 광경을 보고 스스로가 너무 부끄럽고 백성들한테 미안해서 "너희들이 이런 나도 왕이라고 생각해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내가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냐. 다시 말을 돌려 도성으로 가자. 끝까지 백성을 지키겠다.” 

혹은 “아… 너무 면목이 없구나. 일단 위로 올라가 목숨을 부지해서 얼른 대책을 세우고 훗날 나라가 안정되면 내 너희들을 잊지 않으마” 해야 정상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의 선조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나 지나가면 이 다리 다 없애. 아무도 나 못 쫓아오게”라고 했단다 (원샷, 맥주캔 와드득). 

나 같으면 이 소리를 듣고 들고 나온 문짝을 들어 뒤통수 한번 거세게 후려쳐줬을 듯싶다.  




의주로 피란을 가서는 그곳에서 아예 왕위를 버리고 요동으로 망명 요청까지 했단다. 

(두 번째 캔을 가져와야 하나) 

본인도 그냥 나라를 비우고 가긴 뭐 했는지 보통은 수년에 걸쳐서 하는 세자 책봉을 단 며칠 만에 후다닥 해치우다시피 하고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을 왜에 맞서 싸우라고 최전선에 보냈다. 

(안 되겠다 두 번째 캔 꺼내와야겠다) 

백성을 버리고 간 비겁한 아버지가 창피하고 자신을 전쟁터에 떠민 아버지가 너무 싫었을 법도 하지만 백성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광해군은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관군과 함께 왜에 맞서 싸웠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궁으로 돌아온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과 함께 국난을 해결하려고 애썼던 광해군이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자 아들에게 고마워 하기는커녕 오히려 아들을 질투하고 미워했다 (사이코패스인가…?). 

선조의 이런 옹졸하고 뒤틀린 심성은 아들인 광해군한테 뿐 아니라 이순신, 정철, 류성룡 등 우리가 잘 알고 존경할 법한 사람들에게 작용해 그야말로 최악의 갑질을 해댔다.   




선조가 왜 이렇게 꼬였나… 이렇게까지 사람이 못날 수가 있나…궁금해졌다. 

(전 상사가 떠오르기도 하고… 퇴근하면서 매일 같이 했던 생각이라…) 


보통 본인 스스로가 콤플렉스가 있고 자존감이 낮은 경우 본인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아랫사람을 하대하고 못살게 굴면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선조의 경우도 비슷하다. 선조는 서자 출신의 왕이다. 서자에 대한 차별이 공공연했던 당시로서는 서자가 왕이 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직계도 아닌 방계 출신의 선조가 왕이 되었으니 이를 못마땅하게 보는 시선도 많았고 선조 본인도 가시방석이었으리라.  


이런 콤플렉스를 본인의 능력으로 뛰어넘어 위기를 기회로 만든 왕이 영조, 정조가 대표적이라면, 본인의 콤플렉스를 극복 못하고 피해의식에 젖어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잘나고 능력 있는 신하들을 가만 두지 못했던 콤플렉스 투성이가 바로 선조다.  


선조는 서자라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신하들을 이간질하여 분열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그것이 붕당의 분열로 이어져 동인과 서인은 치열하게 싸웠고 이 분열 속에서 선조는 “균형”을 찾고 왕권을 유지하려 했다. 


동인과 서인이 철저히 분리되어 서로 헐뜯고 천적이 되길 원했던 선조에게 정여립과 같이 서인이었지만 동인 사림들과도 친분이 두터워 동인으로 붕당을 옮긴 인물은 눈엣가시였으리라. 선조 시절 영조의 탕평책과 같은 의견을 제시한 신하가 있었다면 제 명에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의도적으로 신하들을 분열시켰던 선조는 신하들의 화합이 가장 두려웠을 것이다. 분열을 통해 왕권을 유지한 선조에게 신하들의 화합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도전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선조는 믿었다. 때문에 정여립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고, 선조는 본인이 기축옥사를 주도해 정여립과 그와 관련된 인물들을 역모로 몰아 1,000명을 죽였다. 그러나 이 책임을 관동별곡으로 유명한 정철에게 뒤집어 씌우고 유배를 보냈다.  




놀랍겠지만, 내가 오늘 이렇게 선조의 욕을 주구장창 하며 자꾸 맥주병을 따는 목적은 사실 도루묵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도루묵 이름에 얽힌 일화도 선조의 (제멋대로 하는) 성격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평양성을 거처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 

이렇게 바쁘게 도망 다니시느라 선조는 끼니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러다 의주에서 피란 생활을 하던 중에 한 백성이 선조에게 생선이 올려진 상을 대접했다. 

(데자뷔인가… 공주에서의 인조가 생각이 난다.) 


선조는 생선이 너무 맛있었던지 (데자뷔야 이건… 인조가 자꾸 생각이나.. 피란 중에 뭘 자꾸 먹고 맛있대…), 백성에게 생선의 이름을 물었다고 한다.  

“이 생선의 이름은 무엇이냐?” 

했더니 백성은 “묵이라 하옵니다” 했다.  

맛에 비해 이름이 너무 초라하다고 느꼈던지 선조는 

“이렇게 맛있는 생선의 이름이 묵이라니.. 앞으로 이 생선을 은어라 하여라”라고 했다. 

(전쟁 중에 아마 백성들 본인은 정작 그 생선이 귀해 못 먹었을 텐데, 왕이라는 작자가 와서 힘들게 밥 한상 기껏 차려줬더니 어디서 맛이 어쩌네 이름이 어쩌네야…)    


나중에 전쟁이 수습되고 다시 궁에 돌아온 선조는 피란 길에 먹었던 은어의 맛을 잊을 수가 없어 은어를 잡아다가 상에 올리라고 했다. 얼마 후 은어를 맛본 선조는 크게 실망하였다. 예전에 먹었던 그 맛이 아니었단다. 


피란 길에 잔뜩 굶주린 탓에 그 생선이 더 맛있게 느껴졌던 건지, 아님 환궁을 하고 궁궐의 산해진미에 입맛이 다시 높아져 은어에 대한 애정이 식은 건지, 선조는 다시 맛 본 은어가 영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실망한 선조는 은어의 이름을 다시 

“도로 묵이라고 해”라고 명했다. 


그래서 원래 이었던 생선은 의주에서 선조 때문에 은어로 이름을 바뀌었다가 입맛이 변한 선조 때문에 다시 도로묵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생선 일생 한번 참 피곤하구나)


그 후 백성들 사이에서 도로묵이라고 불리다가 이후 모음 역행 동화로 도루묵으로 발음이 되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도루묵으로 불리고 있다.




항간에서는 도루묵과 선조와 관련된 이 일화가 사실이 아니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일화가 사실이든 아니든 당시 이 일화가 만들어지고 백성들 사이에서 진실처럼 전해졌다는 것 자체가 선조에 대한 민심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선조의 책임감 없고 자기 멋대로 하는 모습을 비꼬아 생선 이름에 당시 왕의 모습을 투영한 백성들의 재치 또한 참 재미있다.  



간판 사진 thanks to 나의 벗 신혜인


다음 편은 설렁탕과 부대찌개의 역사로 찾아올게요 :)


 
 
 
   

   

매거진의 이전글 “이 떡의 이름은 무엇이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