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농탕이 설렁탕이 되기 까지, 그리고 그 후 경성
무더운 여름날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할아버지 할머니와 3살 위 오빠랑 교회 끝나고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어릴 때부터 예의가 바랐던 오빠는 할아버지께 무슨 음식이 드시고 싶은지 물었고, 할아버지는 설렁탕이 드시고 싶다고 하셨다. 내가 조금만 철이 들었어도 할아버지가 드시고 싶다면 무조건 “가요 할아버지!” 했을 텐데 그날은 유독 더웠고 (이도리는 소양인이라 더위에 약하다), 초 2 입맛에 허여멀겋고 달지도 짜지도 않은 설렁탕은 맛없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이도리는 차 뒷 자석에서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안전벨트를 풀고 신발을 벗어 내동댕이치고 덥다며 팔을 벅벅 긁어댔다.
초등학교 2학년이지만 나도 창피한 게 뭔지는 알아서 할아버지 앞에서 그렇게까지 투정을 부리지는 않았었는데, 저학년 초딩에게 이열치열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그날은 너무 더웠고 (더위를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와중에 김이 펄펄 나는 설렁탕을 먹으면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평소보다는 도가 지나친 투정을 부렸다.
점잖은 할아버지는 당황하신 눈치셨고, 설렁탕 집 주차장에 도착하셔서 "그럼 우리 손녀 먹고 싶은 음식이 뭐냐"라고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시며 물어보셨다. 그때 나는 새콤달콤한 냉면이 먹고 싶어서 “나 냉면~ 냉면!” 했다.
평소 예의 바르고 할아버지를 유독 잘 따랐던 오빠가 망나니 같은 동생의 모습에 화를 참지 못하고 (오빠도 더위를 먹었나 보다) 나의 정수리를 있는 힘껏 가격했다.
“그냥 먹어! 할아버지가 드시고 싶으시다잖아!!”
원래 화도 잘 안 내고 항상 나한테 져주던 오빠였기에 난 오빠의 행동이 몹시 당황스러웠다. 몇 초간 나는 상황 파악이 안 되다가 아프기도 하고 너무 창피하기도 해서 감미옥 주차장에서 “으앙!!”하고 울어버렸다.
잊을 수 없는 설렁탕과의 추억이다.
어릴 적 음식과 관련된 트라우마가 생기면 커서도 그 음식을 잘 안 먹게 된다. 나도 “트라우마”가 생겨서였는지 커서도 설렁탕을 잘 먹지 않았다. 입맛이 토속적으로 변하면서 아빠를 따라 구수한 음식들을 곧잘 먹으러 다녔지만, 유독 설렁탕은 별로 안 댕겼다.
그러다가 학교에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라는 소설을 배웠고, 워낙 감수성이 풍부할 때라 마지막 김첨지가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하며 죽은 아내를 붙잡고 엉엉 우는 모습을 보고 나도 눈물을 쪼끔 훔쳤다.
일평생 설렁탕 한 그릇 먹는 게 소원이었던 김첨지의 아내가 그토록 먹고 싶었던 설렁탕의 맛이 다시 궁금해졌다. '그렇게 맛있나…? 소원일 정도로?' 해서 십 대 후반에 다시 한번 설렁탕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아빠가 “너 설렁탕 싫어하잖아~ 오빠한테 혼나서 너 설렁탕 안 먹잖아~”하며 놀렸지만, 난 내가 눈물 흘린 문학작품의 주인공들과 공감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설렁탕 집을 나의 의지로 갔다. 입맛이 변했나 아니면 늦가을 쌀쌀할 때 먹어서 그랬나 속이 너무 든든하고 좋았다. 그 이후, 나는 한국을 가면 오빠한테 혼났던 주차장을 피식 웃으며 지나며 설렁탕 집에 들어가 한 뚝배기 하고 나오곤 한다.
오늘은 이 설렁탕의 역사와 유래에 대해 알아보겠다.
<조선 요리학>을 보면 세종대왕이 풍년을 기원하며 농사의 신 신농을 모시는 제단 선농단에서 제사를 올리는 국가적 행사 선농을 한 기록이 나온다. 이때 신농에게 제사 음식으로 쇠고기를 바쳤다고 한다. 행사가 끝나고 나면 쇠고기를 참석한 신하들과 농민, 심지어는 거지에게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국가적 행사고 일반 백성들이 왕을 직접 볼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행사인 경우 인근 지역 주민들이 우르르 몰려 함께 구경을 했다고 한다. 모여든 사람은 많은데 제사 음식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음식을 골고루 나눠주기 위해서 쇠고기를 얇게 자르고 국에 밥을 말아 양을 채웠다고 한다. 여기서도 재미있는 게 선착순으로 먼저 온 사람부터 나눠준 게 아니라 우리나라의 미덕 장유유서를 따라 60세 이상 노인들을 우선으로 선농탕을 나눠 주었다고 한다.
이 쇠고기 국밥을 선농단에서 끓여 나눠 줬다고 해서 처음에 선농탕으로 불리다가 발음이 더 편한 설렁탕이 되었다고 한다.
설렁탕의 유래가 시사하는 바는 농경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선농은 신분을 막론하고 모두가 함께 한마음으로 하는 범국가적 행사였다. 조선시대 때에는 그만큼 농경이 중요했고, 그 농경을 관할하는 게 하늘이라는 인식이 전반적이었다. 오늘도 그렇듯 지도자의 지지율은 나라의 경제, 즉 국민들의 주머니 사정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때도 다르지 않았다. 왕권 강화와 민심의 기반은 백성들의 삶과 직결되었고, 조선 전기는 중농억상 정책에 따라 조선 후기 상업이 중요시되기 전까지는 백성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다. 농사가 생계 수단이었던 백성들에게는 날씨가 매우 중요했다. 백성들은 날씨는 하늘이 관장하는 것이고, 하늘을 분노하게 하는 것도 감동시키는 것도 국왕에게 달려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예전부터 그 해 농사가 풍년이면, 임금이 성군이라 하늘이 도왔다고 믿고, 흉년이 들면 임금의 덕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생각을 했다. 왕의 덕이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당시 진실처럼 받아들여져 조선 왕들은 자연재해가 생기면 본인의 덕이 부족해서 그리 된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조선 왕들은 하늘에 집착을 했다. 세종 때는 그날그날 변하는 날씨에 매일 노심초사하는 게 너무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하였는지 조금 더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미리 날씨를 예측하여 나름대로 대비책을 내놓을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세종 때는 날씨와 관련된 과학 기구들이 유독 많이 생겼다.
세종 때 과학이 꽃피울 수 있었던 이유는 세종이 그만큼 백성들을 의식하는 왕이었고, 그래서 무엇보다 날씨와 하늘을 관찰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를 만들어야 해고, 달과 별의 움직임으로 계절과 시간을 알 수 있는 혼천의를 만들어야 했고, 조선 최초의 역법서 칠정산을 만들어야 했다.
우연이 아니라 세종은 이 모든 것들을 백성을 위해 그리고 본인의 왕권을 위해 만들어야만 했다.
세종이 이렇게 하늘에 집착했듯, 그전부터 다른 왕들도 농사의 모든 일은 하늘이 좌지우지한다고 생각해 선농단을 세우고 일 년에 여러 차례 직접 제사를 지냈다.
물론 이 설렁탕이 선농단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의견도 많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나한테 크게 중요하지 않다. 만약 사실이라면 왕이 백성들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배불리 먹였다는 게 참 따뜻하고 기분 좋은 이야기고 만약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고, 선농탕과 얽힌 왕이 세종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선조를 비꼬아 도루묵이라는 이름을 붙였듯, 세종의 어질고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이런 훈훈한 이야기를 만들어 따뜻한 설렁탕과 연결시켰다는 사실 자체가 세종대왕의 timeless 한 인기를 실감하게 한다.
설렁탕이 본격적으로 널리 소비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이후다. 일제는 1920년대 문화 통치 시기 전쟁물자 보급을 위해 고기를 대량 생산하게 하였다. 때문에 경성 내 정육점이 크게 늘었다. 정육점에서는 소고기를 팔고 남은 소뼈와 그 부산물을 이용한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그것이 경성을 들썩이게 한 설렁탕이다.
천민 중에서도 천민 백정의 손으로 도축된 고기를,
천민 취급을 받던 옹기장이가 만든 싸구려 뚝배기에,
중국 요리에서나 볼 법한 파와 고춧가루를 뿌리고,
식은 찬밥까지 말아 주는 이 이상한 음식은 당시 신분이 낮은 계층이 품위 없이 허겁지겁 먹어대는 음식으로
낙인찍혔다.
한 그릇에 13전.
당시 인력거꾼이 하루 일당으로 50전 정도를 번다고 생각해볼 때 인력거꾼(김첨지... 흑흑)도 며칠을 모으면 무리 없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저렴한 가격이었다. 뿐만 아니라 식탁에 앉는 즉시 일분도 안되어 뚝배기와 깍두기가 나오는 이 음식은 경성의 패스트푸드였다. 길거리에서 일을 하고 시간에 쫓겨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조선의 서민들 사이에서 이렇게 간편하면서도 속이 든든한 설렁탕은 단연 인기를 끌었다.
1930년대가 이르러서는 경성 시내 설렁탕집이 100개가 넘게 생길 정도라니… 뭐 말 다했다.
맛을 또 어떻고.
집에 갈 차비를 털어서라도 설렁탕을 사 먹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별건곤의 말이 회자될 정도로 설렁탕은 가격만 착할 뿐 아니라 맛이 일품이었다.
초반에는 설렁탕이 서민 음식이라는 편견 때문에 체면 차리느라 설렁탕 집에 드나들길 꺼려했던 양반이나 모던 보이 모던 걸들도 점차 설렁탕의 맛에 빠져 주문을 해 먹기 시작하며 거리마다
‘설넝탕 배달부’가 넘쳐날 정도였다고 한다.
(우리는 진정 배달의 민족이다.)
1929년 12월 인기 대중잡지에 기고된 신세대 신혼부부의 일상이 설렁탕의 인기를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청춘 부부가 만나 돈깨나 있을 적엔 양식집이나 드나들겠지만, 어찌 돈이 무제한이겠습니까.
돈은 없고 아침에 늦잠까지 자니 찬물에 손 넣기가 싫어 손쉽게 이것을 주문한답니다.
먹고 나서 화장을 하면 오후 세 시나 되고 공원 같은 데 놀러 다니다
저녁 늦게 집에 들어가게 되니 밥을 지어먹을 새가 없어 또 이것을 시켜다 먹는답니다."
이것은 바로 경성의 패스트푸드 설렁탕이다.
이처럼 신분과 세대를 막론하고 조선에서의 설렁탕의 인기는 대단해 한국에 온 일본인들도 꼭 먹는 음식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한국전쟁 이후부터 미국으로부터 원조받은 밀가루 국수가 더해지면서 경성 패스트푸드 설렁탕은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한 음식에 얽힌 이야기가 이렇게도 많다는 것, 그 인기가 시대를 관통한다는 것, 그리고 음식이 시대상을 반영한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을 설렁탕의 유래를 통해 배울 수 있다. 이렇게 음식에 관련된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평소 별생각 없이 먹던 음식들이 조금씩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김춘수의 시가 생각난다.
내가 설렁탕의 역사를 모르기 전까지
그건 그냥
하나의 국밥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설렁탕의 역사를 알고 나니
설렁탕은 나에게 와서
국밥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
이렇게 설렁탕으로 시 한수 읊고 나니 배가 고파진다. 뭐라도 먹어야겠다.
코로나 풀리면, 설렁탕, 한 뚝배기 하실래예?
간판 사진 제공 thanks to 나의 벗 신혜인
다음은 부대찌개에 얽힌 이야기로 찾아올게요.
오늘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