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찌개와 끓여진 한 많은 우리 현대사
3년 전 미국에서 스몰 웨딩을 하였다. 양가 부모님께서 참석하실 수 없는 상황이라 정식 결혼식은 나중에 한국에서 올리기로 하고 미국에서는 작은 규모로 친한 친구들을 초대해 신랑과 내가 부부가 됨을 알리기로 하였다. 아무리 스몰 웨딩이라도 혼자 준비하는 상황이라 모든 게 서툴고 어려웠다. 그래서 미국에서의 결혼식은 신랑의 미국인 호스트 부모님께서 도와주시기로 하셨다. 남편이 처음 미국에 와서부터 함께 지냈으니 정이 정말 많이 들어 호스트 부모님께서는 신랑을 정말 친아들처럼 아껴주셨고, 신랑은 친부모님 대하듯 호스트 부모님을 대했다.
이제 어엿한 사회인이 된 우리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도리는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은혜를 갚자는 의미에서 작년 추석을 앞두고 있을 우리의 한국 결혼식에 두 분을 초대했다. 일흔이 훌쩍 넘는 나이에도 두 분은 첫 한국 여행에 들떠 우리보다 에너지가 넘치셨다. 우리는 결혼식 와중에 효도 관광까지 겸하려니 피곤하고 힘이 들었지만, 백발의 미국인 부부가 어린아이 같이 좋아하시는 모습에 관광지 이곳저곳을 모시고 다녔다.
한국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는 공항에서 무엇이 가장 인상 깊었냐고 물었다.
‘경복궁 야간 개장은 내가 봐도 좀 멋지긴 했어…아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도 좀 신기해하셨는데… 전쟁 박물관에서도 사진을 많이 찍으셨던데… 아님 덕수궁? 인사동?’ 하며 마음속으로 그분들의 대답을 예측하고 있었는데, 대답은 정말 의외였다.
“스팸. 스팸을 그렇게 고급스럽게 포장해서 파는 게 너무 신기했어."
하고 많은 물건들 중에 스팸이 인상 깊었다니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좀 상했다.
이분들이 한국 마트 구경을 하시고 싶다고 하셔서 마트 구경을 갔다가 추석 선물 세트를 보기 좋게 포장해 진열 해 놓은 것을 보시고 신기해하셨던 게 기억이 났다.
미국에서는 스팸이 질이 낮은 고기를 갈아서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라는 인식이 있다.
그래서 전쟁 같은 국가 초유의 사태가 아니고서야 미국 일반 사람들은 스팸을 많이 사지 않는 것 같다.
생각해보니 나도 미국에서 장을 볼 때 한 번도 스팸 섹션이 비어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요즘 미국 사재기 열풍에 휴지는 진작에 구할 수도 없었고, 급기야 친구가
“야, 난 스팸 섹션이 비어있는 걸 오늘 처음 봤어!”하는 말을 듣고 다시 한번 미국인들 사이에서의 스팸에 대한 인식과 또 코로나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스팸에 대한 선호도가 낮아 국가 비상사태가 아니고서야 잘 사지 않는 스팸을 경제 대국 우리나라가
민족 대 명절 추석에 선물 세트로 아주 정성스럽게 포장해서 파는 모습이 외국인들 시각에서는 좀 의아했던 것 같다. 지하철 역에도 쇼핑센터가 즐비해 자본주의 국가의 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소비문화가 성장하고 국민 소득도 높은 이 세련된 국가에 스팸을 고급 선물로 주고받다니 좀 이상했을 법도 했다.
호스트 부모님들과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미국에서는 국가 비상사태 때나 살까 말까 한 스팸을 우린 왜 추석 때 고급 선물세트로 포장해서 팔까?’
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한국전쟁시기 미군들을 통해 들어왔던 미제 생산품과 그 나라에 대한 동경이 우리도 모르게 지금까지 남아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으로 인해 당시 초토화된 우리나라는 한 끼조차 제대로 해결할 수 없는 피란민들이 넘쳐났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던 미군들은 자국으로부터 전쟁 물자나 생필품을 받아 생활을 했다. 그 경로를 통해 초콜릿, 껌, 햄, 소시지와 같은 것들도 함께 들어왔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 음식을 접해보지 못했고, 일단 맛을 보면 달고 짜고 하는 자극적인 맛 때문에 한번 먹고 나면 자꾸 생각이 나 그때부터 미제 음식에 대한 동경이 생겼던 것 같다.
여담으로 춘천에 가면 꼭 외할머니랑 시간을 보내곤 하는데, 한 번은 외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시장 귀퉁이에 있는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보여주며
“여기가 미제 물건 파는데야”해서
“아직도 이런 곳이 있어요?” 했더니 할머니가
“껌 사줄까?” 하셨다.
내가 말릴 겨를도 없이 할머니가 껌을 12,000원어치(춘천의 큰손 송여사) 사셨던 기억이 난다.
검은 비닐봉지가 무거워질 정도로 껌이 가득 담겨
“할머니 이 많은걸 언제 다..”했더니
“걱정 마 교회 가져가서 미제 껌이라고 할머니들 주면 다 좋아해”하셨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제는 동네 마트나 편의점만 가도 손쉽게 국산 초콜릿이나 껌을 구할 수 있지만,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들에겐 어릴 때 실감한 그 미제라는 프리미엄이 깊숙하게 각인이 된 것 같다. 살기 어려운 시절, 우리를 도와주러 온 미국 군인들이 주는 달고 짠 음식들을 보며 우리는 먹고살기도 어려운데 저 나라 사람들은 이런 것도 먹고사는구나 하며 생겨났을 미제에 대한 동경이 아직까지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 남아 있어 오늘날 스팸을 추석 선물로 파는 게 아닐까.
오늘은 그래서 미국산 햄과 관련된 음식, 부대찌개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부대찌개는 한국전쟁 시기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미군들은 먹다 남은 음식물 쓰레기나 유통기한이 지나서 더는 못 먹게 되는 것들을 잔반 처리하는 인력에게 넘겼다. 그러나 전쟁 중에 한 끼도 제대로 못 먹었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군이 버린 이 잔반을 버리는 대신 다 뒤져가며 형태가 있는 소시지나 햄과 같은 건더기들을 건져냈다. 미군 잔반에서 1차로 건저 낸 건더기들을 식당가에 팔면 식당에서 고춧가루와 김치를 넣어 팔팔 끓였다고 한다.
부대찌개에 대한 회고담을 보면, 음식이 기름졌다는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기 조각 자체에서 나오는 기름, 이미 조리가 되었던 햄버거 패티, 미국 음식에 많이 들어가는 치즈나 버터 같은 게 섞이면서 기름이 많이 나왔던 것 같다. 그래서 끓이는 과정에서 기름진 맛을 잡아주기 위해 고춧가루와 김치 같은 매운맛 음식들을 넣어 오늘날 우리가 흔히 하는 빨간 부대찌개의 모습이 된 것 같다.
당시에는 누가 먹다 버린 비위생적인 음식이라도 끓이기만 하면 안에 들어있을지 모르는 곰팡이나 병균이 죽어 먹어도 안 죽는다고 생각했다. (정말 이 대목에서 죽지 않으려고 먹었다는 말이 와 닿았다)
당시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는 와중에 살 수만 있으면 곰팡이나 병균이 들어간 음식도 마다하지 않고 먹었다. 1950년대 우리에겐 비록 음식물 쓰레기에서 건져낸 거지만 소시지나 햄과 같은 고기가 들어간 부대찌개는 나름 호화로운 음식이었을지 모른다.
부대찌개는 그나마 양반이고 이번에 조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꿀꿀이죽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1차적으로 건더기를 건져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건더기들을 가게에 팔고 그 남은 잔반을 또 팔았다고 한다.
그럼 그걸 한번 더 끓여 먹었다. 그게 바로 꿀꿀이 죽이다. 꿀꿀이 죽은 형태가 사라진 소시지나 햄 부스러기, 샐러드 조각, 빵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끓이는 와중에 한데 뒤엉켜 꾸덕한 죽이 되었고, 이러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모양 때문에 꿀꿀이 죽이라고 불렸던 것 같다. 꿀꿀이 죽이야말로 잔반 중에도 잔반이니 어쩔 때는 담배꽁초나 수세미 부스러기 같은 것들도 나왔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군이 주둔하고 있던 의정부와 동두천에 본격적으로 부대찌개 가게들이 생기면서 이 지역 부대찌개가 더 인기를 끌었다. 부대찌개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라면 사리의 존재는 언제부터 등장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못 찾았지만, (설렁탕 국수와 마찬가지로) 전쟁 이후 미국의 원조로 밀가루 생산이 활성화되면서 부대찌개에 첨가된 게 아닌가 싶다. 이후 의정부에는 부대찌개 거리가 생길 정도로 의정부에 부대찌개 붐이 일었고, 나중에는 부대찌개라는 어감이 좋지 않다고 해서 의정부찌개로 개명하기도 했었다.
조선부터 차례로 한 시대를 풍미하는 음식을 소개하고 싶어서 그간 숙주나물, 인절미, 설렁탕을 소개했다.
현대사의 대표적인 우리 역사 6.25 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대중 음식이 뭐가 있을까 하다가 부대찌개가 해방 이후 우리 생활상을 잘 담아내는 음식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부대찌개를 현대사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선정하고 더 공부해보았다.
평소 부대찌개를 좋아해 신랑이랑 한국을 가면 부대찌개 체인점에 가서
“라면 사리 추가해주시고, 치즈도 넣어주시고, 어묵도 넣어주세요~”라며 내가 먹고 싶은 걸 골라 추가까지 해가며 먹기 바빴는데, 부대찌개가 생긴 유래를 보니, 나처럼 이것저것 골라서 추가해 먹기는커녕,
누군가 먹다 버린 음식을 그 마저도 감사해하며 죽지는 않겠지 하고 먹었다는 생각에 그간 내가 너무 아무 생각 없이 부대찌개를 먹은 게 아닌가 좀 반성하게 되었다.
또 남이 먹다 버린 것 까지 먹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는 사실이 오늘날 90년대생에겐 와 닿지 않을 정도로 너무 먼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사실상 그리 먼 과거가 아니라는 생각에 새삼 놀랐다. 이번 편을 쓰면서 마음이 특히 좀 더 힘들었던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맛있는 부대찌개가 우리 할머니 세대한텐 어쩌면 아픈 기억의 음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부대찌개가 탄생하게 된 그 고통스러운 시대는 그리 멀지 않은 역사인데,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다음 세대가 같은 음식을 맛있고 좋게만 기억할 수 있도록 노력해온 이전 세대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간판 사진 thanks to 나의 벗 박은미
다음 편은 제주 4.3 사건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