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s Pick 핫 플레이스 4: 고양시 서오릉
가끔 나는 재미있는 상상을 한다. 내가 만약 조선시대로 돌아간다면 누구를 만나볼까?
나는 성종의 엄마 인수대비와 숙종의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를 만나고 싶다.
일단 인수대비를 만나서는 좀 따지고 싶은 것들이 많다.
그리고 인현왕후를 만나서는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공교롭게도 이 인물들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있으니 그곳이 바로 서오릉이다. 그래서 이번 편과 다음 편에는 서오릉에 관한 소개와 동시에 인수대비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숙종의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서오릉에는 창릉, 경릉, 명릉, 익릉, 홍릉이 있는데, 일단 난 볼일이 경릉에 있으니 경릉부터 가겠다.
경릉은 덕종과 소혜왕후의 묘가 있는 곳이다.
(소혜왕후와 인수대비는 같은 인물이다. 소혜왕후가 나중에 높여져서 인수대비가 된 것이다.)
역사 좀 한다 하는 사람이라면 “엥? 덕종?”하면서
태정태서문단세를 다시 읊으면서 “덕종은 분명히 없는데…” 할 수도 있다. 그게 바로 나였다…ㅎㅎ
우리가 흔히 외우는 태정태세문단세의 이름들은 묘호다. 묘호가 무엇이냐 하면, 왕이 죽고 나서 신하들이 “아…. 방금 돌아가신 왕은 성품이 어질고, 효심이 깊었어. 효심이 깊었으니까… 효종으로 하자!”이런 식으로 왕의 지난 업적을 돌이켜보며 종묘에 신위를 모시기 전에 붙이는 이름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왕이 죽으면 붙여지는 이름!
덕종을 우리가 못 들어본 이유는, 덕종은 살아있을 때 왕이 아니었다. 왕이 될 수는 있었으나 왕이 되기 전에 죽어서 죽었을 당시의 신분은 왕세자였다. 그러나 후대 왕 성종 (덕종's son) 이 “에이, 그래도, 아버지도 왕이 될 뻔하셨는데 높여드리자” 해서 추후에 예외적으로 덕종이라 추존되었다.
그럼 사후에 추존된 덕종이 누군가?
덕종은 세조의 첫째 아들 의경세자다.
세조가 계유정난을 통해서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스스로 왕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세조의 첫째 아들이 왕세자로 책봉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예의가 바르고 책을 가까이하여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병약했다. 그래서 시름시름 앓다가 아내 소혜왕후와 슬하에 자녀 3명을 남기고 스무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여기에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세조가 영월에 유배를 보냈던 단종에게 사약을 먹이기로 작정하고 잠이 든 그날 밤, 이미 예전에 세상을 떠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서 겁나 무서운 얼굴로 “너 새끼의 징글징글한 욕심으로 내 아들의 왕위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이젠 내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구나!! 네가 내 아들을 죽이니, 나도 네 자식을 죽일 것이야!!”하고 세조에게 침을 퉤 뱉었다. 악몽이었다. 하지만 너무 생생했다.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도 꿈에서 현덕왕후가 침 뱉은 자리가 간지럽더니 급기야 진물이 나고 엄청난 피부병으로 번졌다.
꿈에서 깬 세조는 너무 무서워서 다시 잠에 들지 못하고 뒤치락거리고 있는데 의경세자가 거처하고 있던 동궁전의 내시가 급히 달려와 세자가 곧 죽을 것 같다는 것이다!! 놀란 세조는 급히 달려가지만, 이미 의경세자는 세상을 떠났다. 과연 현덕왕후의 말대로 세조의 첫째 아들 의경세자는 세상을 허무하게 떠났다.
세조는 자신이 죄를 하도 많이 지어 아들이 죽은 것이라고 생각이 되어 의경세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의경세자가 묻힐 자리를 직접 보러 다니면서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좋은 땅을 선정했다. 그렇게 정한 곳이 서오릉이고 그중에 경릉이다. 그렇게 세조의 첫째 아들 의경세자가 경릉에 묻혔다.
의경세자가 죽고 나서 갑자기 세조를 이을 왕의 자리가 공석이 되자 세조의 둘째 아들이 세조에 이어 왕이 되는데 그게 바로 예종이다. 그러나 원한 맺힌 현덕왕후의 저주가 너무 센 탓일까… 결국 예종도 왕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는다. 갑작스럽게 예종도 승하는데, 예종 슬하에는 왕이 되기엔 너무너무 어린 아들이 있었다. 그래서 선택된 아이가 바로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산군이다. 자산군이 추후 성종이 된다.
자자, 이름이 너무 많이 나와서 ‘아 그만 읽어야겠다’ 할 수도 있지만, 잠깐, 나가기 전에 나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쉽게 설명해보겠다. 세조의 첫째 의경세자가 왕이 될 뻔하였으나, 죽었다.
죽기 전에 다행히 아들 둘을 낳았다. 그러나 당시 그 아들들은 나이가 너무 어려서 왕이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세조의 둘째 아들이자 의경세자의 남동생 예종이 왕이 되었다.
그러나 예종도 곧 죽었고, 그때 예종의 아들은 이제 겨우 4살이었다.
그 사이 의경세자의 두 아들은 나름 무럭무럭 자라서 왕위를 이어도 될 나이가 되어서 작은 아버지인 예종을 이어 자산군이 성종으로 왕위를 이어받았다.
성종이 왕이 되고 나서 자신의 아버지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시킨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대부분 남성 위주로 서술되어 있는데, 이 복잡한 왕위 계승에 가려져 있는 여성이 있으니 바로 소혜왕후다. 자 가만히 생각해보자. 소혜왕후는 시아버지 세조가 갑자기 정변을 일으켜 하루아침에 왕세자빈이 되었다. 그리고 슬하에는 건강한 아들이 둘이나 있다. 조금만 버티고 있으면 남편이 왕이 되어 자신은 왕비가 될 것이고, 더 조금만 있으면 아들이 왕이 되어 자신은 대비가 될 것이다. 한마디로 앞으로 펼쳐질 인생이 황금빛이다. 내가 만약 하루아침에 왕세자빈이 된 소혜왕후였다면, “으아 역시 인생은 한방이야!”하면서 손뼉 치고 기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조금만 기다리면 왕이 될 뻔했던 신랑이 일찍 죽어버린다. 왕이 없는데 어찌 왕비가 될 수 있겠는가…
결국 소혜왕후는 신랑 의경세자가 승하하자 궁을 나가야 했다.
내가 소혜왕후였다면 “아이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렇게 줬다가 빼앗는 게 어딨어요… 엉엉”하며 하늘을 원망하며 자포자기했을 것 같다. 그러나 똑똑했던 소혜왕후는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혜왕후는 훗날을 도모하면서 아들을 아주 전략적으로 키운다. 두 아들을 객관적으로 볼 때 첫째보다 둘째의 앞날이 밝아 보였는지 둘째 아들의 결혼 상대를 물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권세가 한명회와 혼담을 주고받아 둘째 아들 (훗날 성종)의 장인어른으로 한명회를 섭외해놓는다. 끈 떨어진 집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법한 상황에 어머니 소혜왕후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아들 훈육에 힘을 써 혹시 모를 기회에 대비하여 아들을 흠 잡힐 것 없이 키워내고 정치적 빽으로 한명회를 심어 놓는다. 소혜왕후의 이러한 준비성은 곧 빛을 본다.
남편의 동생이었던 예종이 승하하면서 예종의 아들이 너무 어리다고 판단이 되어 자연스럽게 소혜왕후의 아들에게로 왕의 자리가 돌아간다. 이때 세조의 부인이자 왕실의 최고 권력자 정희왕후는 소혜왕후의 둘째 아들 자산군을 왕으로 지목한다. 한명회를 장인으로 둔 자산군의 왕위 계승에 반발하는 신하들은 없었다.
이로써 소혜왕후는 왕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왕의 어머니인 대비의 신분으로 다시 궁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소혜왕후에서 인수대비로 높여진다. (소혜왕후와 인수대비는 같은 인물이니 헷갈리지 말자!!)
남편이 죽고 출궁을 하여 모두가 소혜왕후의 처지를 불쌍하게 여기며 혀를 끌끌 찰 때 소혜왕후는 절망하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대신 자기 계발을 하면서 무섭도록 책을 읽어 나갔다. 이랬기 때문에 나중에 성종이 왕이 되고 난 이후에 원칙대로라면 성종의 할머니 정희왕후가 왕실의 가장 높은 어른이기에 성종의 수렴청정을 해야 하지만 정희왕후가 “아휴, 나는 한자를 못 읽어. 우리 며느리 소혜왕후는 한자도 잘 읽고 워낙 똑똑하니까 우리 며느리가 성종 수렴청정하라고 그래”라고 할 정도로 왕실 어른들의 신임을 받으면서 그녀의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당시 여자가 아무리 사대부 집안이라고 해도 한자를 읽는 일은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소혜왕후는 한자를 읽을 줄 알았고 스스로 끊임없이 공부하고 자기 계발을 하여 나중에 이렇게 보란 듯이 멋지게 다시 궁으로 데뷔할 수 있었다.
자, 인수대비의 칭찬은 딱 여기까지다.
조선시대 왕 중에는 폐위된 인물이 둘이 있는데 바로 광해군과 연산군이다.
이 중에서 광해군은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좀 감싸주고 싶은 부분들이 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인조의 무모한 북벌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이고 백성들에게 득이 되는 것이었다. 또한 대동법 시행에 있어서도 칭찬할만하다. 그러나 연산군은… 정말… 폭군도 이런 폭군이 없다. 연산군은 포악함과 잔인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나는 연산군의 이러한 포악함의 뿌리를 할머니 인수대비에게서 찾는다.
조선시대 왕들 중 무능하고 답답해서 개인적으로 안 좋아하는 왕 TOP 3로는 선조, 인조, 고종 이렇게 있다.
그러나 업적은 뛰어났을지 모르나 한 인간으로 놓고 보았을 때 정내미가 뚝 떨어지는 왕이 있으니 그게 바로 성종과 숙종이다.
숙종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 하기로 하고, 성종에게 내가 인간적으로 실망한 이유는 그의 비뚤어진 성리학적 여성관 때문이다.
성종의 업적은 정말 많다. 다들 성종하면 경국대전 완성부터 시작해서 두세 개 정도는 나열할 수 있으니 업적에 관해서는 굳이 말 안 하겠다. 낮에는 그렇게 열심히 업무를 보았을지 모르나 밤의 성종의 모습은 성군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술과 여자를 좋아했던 성종은 첩이 많았다.
뭐. 조선시대 왕들은 다 첩을 여럿 두고, 아들딸 많이 낳아야 왕실의 대를 이을 수 있는 거니까 그렇다 치자.
그런데 내가 성종을 용서할 수 없는 부분은 여기서부터다.
성종의 중전은 우리가 흔히 아는 연산군의 친 어머니 폐비 윤 씨였다. 성종은 처음부터 윤 씨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윤 씨는 임신을 했고, 뱃속에는 왕위를 이을 연산군이 있었다. 윤 씨가 아이를 갖고 낳을 때 동안 성종은 윤 씨를 돌보는 대신 이 첩, 저 첩… 첩들과 노느라 정신이 없으셨다.
오늘날은 출산한 여성이 겪는 극도의 스트레스와 감정 변화를 산후 우울증이라 일컫고, 출산한 산모 다수가 겪는 일반적인 증상이라 하여 주변 가족들은 산모의 감정 기복을 이해하고 조심하는 편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산후우울증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인지, 성종은 임신하고 출산한 윤 씨를 거들떠보지 않았고, 이에 예민하게 구는 윤 씨를 시어머니 인수대비는 매우 매우 못마땅하게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힘들게 산후우울증을 앓고 있던 윤 씨의 생일이 왔다.
그래도… 인간적으로… 생일인데… 그것도 중전의… 그것도 왕세자를 갓 출산한 중전의 생일에… 어김없이 성종은 다른 첩들과 놀아나고 있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윤 씨는 급기야 나중에 찾아온 성종에게 화를 냈고,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남겼다.
이를 본 시어머니 인수대비는 그 길로 당장 중전 윤 씨를 폐비시키라고 명했다.
자신도 출산을 해봐서 경험이 있으면서! 같은 여자로서 며느리를 조금 더 보듬어주고 보필해주지는 못할 망정 “아니, 어디 감히 우리 주상의, 그것도 내 아들의 얼굴에 너 따위가 감히 손톱자국을…!! 당장 폐위시켜라!!”하면서 윤 씨를 그 길로 폐출시키고 곧이어 윤 씨가 머무는 사가에 사약을 보내어 죽이기까지 한다.
나중에 이 비밀을 모두 알게 된 인수대비의 손자 연산군이 피 묻은 어머니 윤 씨의 저고리를 웅켜 안으며 뚜껑이 제대로 열리고 눈깔이 완전히 돌아간다. 그렇게 획 가닥 한 연산군은 성종의 첩들을 아주아주 잔인하게 죽이고, 할머니 인수대비에게로 달려가 칼을 뽑아 들며 횡포를 부렸다. 얼마 후 그 충격으로 인수대비는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성종 때 폐비 윤 씨 사건과 더불어 내가 성종을 싫어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어우동 스캔들이다. 우리는 흔히 어우동 하면 화려한 전모를 비스듬히 쓰고 곰방대를 물고 다니는 아주 예쁜 기생의 모습을 떠올리곤 하는데 사실 어우동은 기생이 아닌 양반집 규수였다. 시집을 갔지만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한순간 소박맞은 어우동은 그때부터 자신도 자신의 욕정을 채우면서 자유롭게 살기로 마음을 먹고 무려 공식적인 기록에 의한 것만 17명과 스캔들이 난다. 그 17명 중에는 고위급 관리들과 왕실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어디 뭐 스캔들은 한 사람만 마음이 있다고 나나. 누구 한 명의 책임이 아닌 당사자 두 명의 책임이지만, 성종은 '어디 아녀자가 성리학 질서를 흐트러뜨리며 문란하게 행동을 하느냐!!' 하면서 적법한 절차 없이 규정된 형벌을 뛰어넘는 과잉 처벌까지 단행하며 어우동을 일벌백계하겠다며 단시간에 어우동을 처형시킨다. 밝혀진 17명의 간통남들은 대부분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로 풀려나고 심지어 어우동을 강간했던 노비까지 풀려난다. 그리고 어우동과 간통을 했던 관료들은 모두 복직된다.
경국대전까지 완성하며 법치 국가를 운운하셨던 분께서 이렇게 한 여성의 목숨은 가볍게 여기며 적법한 절차 없이 바로 죽이는 모습을 보며 난 성종에게 인간적으로 너무 실망했다.
어떤 이들은 성종 시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조선이 성리학의 국가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평할지 모르겠지만, 난 성종 시기에 들어서면서 비뚤어진 성 인식이 자리 잡게 되면서 여성 인권의 암흑기가 시작되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여성에게만큼은 병적으로 엄격하고 냉정했던 성종은 이전 고려시대부터 유지되어오던 여성의 재혼까지도 법적으로 금지한다.
고려 시대 때는 워낙 외적들의 침입이 잦아서 많은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죽었다. 당장 생계가 어려워진 여성들은 재혼을 통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많게는 세 번씩 재혼을 하고 심지어 왕에게 까지 재가를 하는 여성도 있을 정도로 재혼에 개방적이었다. 그러나 성종 때 들어서는 재가 금지법이라고 하는 법을 만들면서 사별해서 먹고살기가 어려워진 청상과부에게도 정절을 요구하면서 재혼을 막았다. 만약 재혼을 할 경우 재혼 여성 본인을 처벌하는 게 아니라 재혼 여성의 아들과 손자를 처벌해서 그들의 과거 응시는 물론 관직 진출을 막았다. 한마디로 자손들을 인질로 삼았던 너무도 잔인하고 불합리한 재가 금지법을 성종이 탄생시켰다. 그러나 남성의 재가는 막지 않았던 성종이다. 유독 여성에게만. 따지고 보면 남성은 처녀와 재혼을 해도 되지만 여성은 남편이 일찍 죽어 당장 먹을 것이 없어도 재혼을 할 수 없었다.
대다수의 관리들은 성종의 재가 금지법과 어우동의 사형과 폐비 윤 씨 사사를 반대했다. 그러나 기어코 성종은 성리학을 세워야 한다는 이유로 여성들을 짓밟았다. 성종 시대에 움튼 여성의 인권과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비뚤어진 성리학적 여성관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성종의 여성 재가 금지법은 갑오개혁 때까지 300년 이상 지속되었다.
성종은 차례로 여성 재가 금지법을 단행하고, 이어서 어우동을 사형시킴으로 인해서 여성들에게 공포심을 조성하고, 그리고 폐비 윤 씨를 사사하므로 남편에 대한 불순종은 한나라의 중전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하는 죄라는 인식을 공표했다. 마지막으로 성종 시기 비뚤어진 성리학적 여성관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인수대비다.
인수대비는 그 유명한 <내훈>이라는 책을 간행한다. 조선시대에 처음으로 여성이 이름을 밝히고 출판한 책이었다. 남존여비가 강했던 조선시대에 최초로 여성이 집필한 책이라니! 하며 들뜬 마음으로 책을 펼치면 내용을 보고 뒷 목 잡고 책을 내던져버릴지 모른다. 내용은 조선시대 여성들에게 남편은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니까 대들지 말고 알아서 기어라, 아내가 말을 듣지 않으면 남편이 채찍질해도 된다 등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같은 여성이, 그것도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 펼쳤다니 기가 막히다.
글쎄… 아들의 성리학 국가 건설을 서포트하다 보니 내훈과 같은 헛소리 모음집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아들의 그릇된 시각을 바로잡아주지는 못할 망정 그걸 곁에서 부추기고, 그러한 결과가 연산군의 광기를 폭발시킨 것 같아 인수대비를 고운 시선으로 보지 못하겠다.
세조는 조카에게는 무섭고 잔인한 숙부였을지 모르겠지만 본인 자식들에게만큼은 달랐던 것 같다. 세조가 특히 며느리 인수대비를 귀하게 여겨 예뻐라 했고, 정희왕후도 며느리의 능력을 인정해 왕실의 주요 사안들을 며느리와 항상 상의할 정도로 인수대비를 아꼈다. 그런 시댁이었으니 본인은 시댁에게 잘할 수 있었겠지.
그런데 폐비 윤 씨에게는 지 아들밖에 모르는 꼬장꼬장하고 숨 막히는 인수대비가 시어머니였다. 보통 시어머니가 아니다. 자기 똑똑한 거 알아서 웬만한 여자들은 다 천하게 여기고 뭘 해도 탐탁지 않아했다. 시어머니가 남편을 하늘같이 섬기고 시댁에게 항상 굽히고 잘해야 하느니라를 본인 입으로 강조하면서 옆에서 잘하나 못하나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으면 잘하려던 마음도 싹 가시겠다.
그리고 본인이야 남편이 병약하여 스무 살에 요절하는 바람에 후궁으로 속 썩는 마음이 뭔지 모르겠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어려움을 며느리가 참지 못한다고 혼을 내고 잘못의 발단인 아들을 질책하기보단 아들 얼굴에 상처를 냈다는 이유로 한 나라의 중전을 폐위시키고 사사했다는 게 정말 화가 난다. 자신이 경험해본 어려움은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며느리를 이해해주고 품어주고 위로해주고, 경험해보지 못한 어려움은 왕실 어른의 입장에서 경청하는 자세로 며느리의 마음을 헤아리며 기강을 잡았다면 연산군과 같은 폭군도, 또 내훈과 같은 희대의 남존여비의 극치를 보여주는 책도, 억울한 어우동과 폐비 윤 씨와 같은 시대의 희생양도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서오릉의 경릉 특히 서쪽에 소혜왕후 릉을 볼 때는 마음속 분노의 붉은 파도가 요동을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