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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ri Lee May 10. 2020

구파 백선생

도리's Pick 서울 핫 플레이스 3: 효창공원 삼의사 묘

요즘같이 날씨가 좋을 때에는 밖에 나갈 수 없는 게 더 힘들다. 

아무리 집순이라도 강제 집순이는 못하겠다! 나가고 싶다 정말!  


우리 집 아파트 옆에는 작은 공원이 있다. 평소에는 좀처럼 사람들을 마주칠 수 없었던 그 작은 공원에, 요즘 같은 때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이도리는 국민의식이 높은 한국이 아닌, 미국에 있다. 미국에는 아직 마스크를 쓰고 다니지 않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 우리 동네는 마스크를 안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그 공원에 나가기도 좀 무섭다. 오히려 마스크 쓰고 다니는 나와 신랑을 대놓고 피하는 경우도 있으니 공원에 나가는 건 무리야 무리.  


그래서 급기야 인터넷으로 공원 산책을 해보기로 했다. 이왕 사이버 세계로 산책 가는 거 한국으로 산책을 가자 해서 정한 곳이 효창공원이다.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효창공원은 본래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묘가 묻힌 효창원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이 묘가 고양시 서삼릉으로 이장이 되면서 효창원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의 병참기지, 식물원, 골프장 등으로 쓰이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다가 해방 후 독립투사들이 묻히게 되면서 호국 공원으로 조성되어 오늘날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사실 내가 오늘 효창공원을 투어 하기로 한 것은 깊이 살펴보고 싶은 인물이 있어서다. 

그 인물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소개하기로 하고, 그전에 빠르게 다른 곳들부터 둘러보겠다.  


일단 임시정부 요인들이 묻힌 묘가 있다. 이곳엔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선생님이 계시고, 조금만 더 가보면 백범 김구 선생의 묘도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의 묘에서 보이는 백범 김구 기념관도 있는데, 내부를 꼭 들어가서 보고 싶은 게 있으나 (시계 시계 윤봉길 의사 의거 전에 맞바꾼 시계가 너무 보고 싶다), 다음번에 직접 방문을 했을 때 살펴보기로 하고 빠르게 넘어가겠다…

백범 김구 기념관 외에도 효창공원에 묻혀 계시는 분들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의열사가 있다. 이곳에는 이동녕, 김구, 조성환, 차리석,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이렇게 7인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나는 오늘 이중에 구파 백정기 의사를 만나볼 것이다.  


효창공원에는 삼의사 가 있다. 여기에 묻힌 삼의사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이렇게 세분이다. 그런데 정작 가보면 안중근 의사의 가묘까지 해서 네 개가 있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에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셨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이 안의사의 시신을 찾아 추모를 하는 과정에서 항일의식이 더욱 고취될까 두려웠던 일제는 안의사의 시신을 감옥 주변에 아무렇게나 묻고 어디에 묻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지금까지도 안의사의 유해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효창 공원에는 안중근 의사의 묘를 가묘로 만들었다. 

하루빨리 삼의사 묘가 아닌 사의사 묘가 되었으면 좋겠다.  


일제는 윤봉길 의사도 마찬가지로 총살한 다음에 윤의사의 시신을 일부러 쓰레기 장 입구에 묻어서 모두가 밟고 다니게 만들었다. 매번 하는 생각이지만 일제는 참 창의적으로 온갖 야만적인 짓은 다 했다. 그러나 당시 박열과 같은 독립운동가의 노력으로 윤의사의 시신은 잘 수습해 해방 이후 우리나라로 모시고 들어올 수 있었다.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의사에 대해서는 좋아하는 연예인 영상 찾아보듯 이분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나 책을 찾아보면서 스스로 많이 공부했기에 이전부터 비교적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독 백정기 의사에 관해서는 많이 들어본 바가 없어서 삼의사 를 보면서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삼의사 묘에 안치될 정도로 엄청난 분이신데 왜 이렇게 낯설까? 

백정기 의사를 먼저 사진으로 만나봤다. 

(잘 생기셨다….)


다른 독립운동가 사진들도 많이 봐왔지만, 사진을 뚫고 나오는 카리스마 있는 눈빛은 정말 최고다.  

‘날 몰라?’하고 무지한 나를 꾸짖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어 이 사진을 옆에 두고 열심히 공부했다.  


1910년 국권 피탈되던 시기 백의사는 15세 소년이었다. 어렸지만, 이때부터 신념이 강했던 백의사는 나라를 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본격적으로 뜻을 펼쳐보고자 고향 정읍을 벗어나 서울로 상경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항일 운동을 하던 중에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만나게 되고 이들과 함께 움직이는 과정에서 자꾸 일제의 눈에 띄게 된다. 국내에서는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일제의 감시가 더 삼엄해지자 국내에서 항일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이 되어 해외로 떠났다.  


백의사는 아나키즘 노선의 항일운동을 선택했다. 당시 여러 노선의 항일운동이 있었다. 어떤 이는 민족주의 노선을 선택하고, 어떤 이는 사회주의 노선을 택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독립이 불가능해 보이자 타협주의 노선을 택하기도 하고… 국내가 혼란스러우니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노선을 취해 당시 상황에 대응했다. 이때 백의사가 선택한 노선은 무정부주의 아나키즘이다.  


비폭력으로 시작했던 3.1 운동이었지만, 평화적으로 시위한 우리 민족에게 일제는 무차별적인 폭행과 학살로 대응했다. 3.1 운동 이후에 더는 평화적인 방법이 아닌 무장투쟁으로 독립운동 노선으로 틀어야겠다고 생각하는 독립운동가들이 많아졌고, 이러한 변화의 사상적 구심점이 된 것이 아나키즘이다. 


아나키즘은 인간의 무한 평등과 자유를 속박하는 시스템과 권력은 처단의 대상이라고 생각했고, 때문에 당시 우리 민족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아간 일제와 관련된 것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믿었다. 아나키즘에 영향을 받은 독립운동가들은 손에 폭탄과 총을 쥐고 일제 수뇌부와 친일파들을 제거하고 일본 주요 건물들을 폭파시킴으로써 의로운 일은 맹렬히 행하기로 결심한다.  


구파 백정기 의사 또한 아나키즘 활동을 통해 일제를 배격하고자 했고, 그래서 최종적으로 자주독립 국가를 쟁취하고자 했다. 백정기 의사는 흑색공포단의 지도부였다. 흑색공포단은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이 섞여 만들어진 아나키스트 단체다. 


여기서 '어? 일제를 처단하는데 왜 일본인이 있어?' 할 수 있다. 나도 완벽하게 이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사회주의 사상이 그러했듯, 아나키즘 또한 국가의 범주를 뛰어넘어 사상에 공감하는 모든 이들을 다 아울렀다. 아나키스트들은 사상은 국경을 뛰어넘는다고 믿었고 (실제로 박열의 그녀 가네코 후미코가 좋은 예다), 그래서 흑색공포단 안에는 아나키즘에 동조하는 일본인도 포함되어있었다. 백정기 의사 또한 사상 아래 국경은 없다고 생각했고, 백의사는 결국 믿지 말아야 할 적국의 민족을 사상적 동지로 받아들였다.  


흑색공포단에 왜 중국인이 있는지를 이해하려면 당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는 1930년대로 일제의 만주 침략이 공고화 되던 때다. 일제가 만주에 만주국을 세우기 위해 움직이던 때고,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했던 때도 일제가 상하이 사변에서 대승을 거둔 이후였으니 중국 입장에서는 열불이 났을 거다. 

‘이 개새끼들이 우리 땅에서 전쟁을 일으킨 것도 모자라 이 사변에서 이겼다고 감히 우리 땅에서 기념을 해?’ 하면서 중국도 이를 바득바득 갈았을 것이다. 이랬던 시기라 중국도 조선 못지않게 일본이 죽도록 미웠을 것이다. 그래서 흑색공포단은 조선인들만이 아닌 아나키즘 사상에 공감하는 한중일 단원들로 구성되었다. 


얼마 전에 밝혀진 사실로는 김구를 수장으로 한 민족주의 진영 한인애국단 출신의 윤봉길 의사만 상하이 사변 전승 축하연을 거사 날로 잡은 것이 아니다. 류자명을 수장으로 한 아나키즘 성격의 흑색공포단의 백정기 의사 또한 같은 날 같은 거사 계획을 가지고 홍커우 공원으로 향했다. 한인애국단과 흑색공포단이 동시에 같은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행사장 출입증을 백정기 의사에게 전달해 주기로 한 중국인 왕야챠오가 거사 당일 잠적해서 결국 백의사는 상하이 사변 전승 기념식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중국인 왕야챠오가 그날 잠수만 타지 않았어도 이 홍커우 공원 거사는 백정기 의사의 거사로 혹은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합작으로 기억이 되었을 수도 있다.  


당시 백의사의 마음을 상상해보았다. 아마 속으로 열불이 나셨을 것 같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한 번에 일본 수뇌부를 싹 다 날릴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하면서 애통해하셨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곧 한인애국단 출신의 윤봉길이 자신을 대신해 거사를 치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어떤 기분이셨을까? 속이 다 시원하고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도 되면서 자신을 대신해 어느 한 젊은 독립운동가가 끌려가서 목숨을 잃겠구나… 하면서, 더한 사명감과 책임감을 느꼈을지 모르겠다. 

‘나 대신 누군가 먼저 희생을 하는구나. 그럼 나는 다음 기회에 저 윤봉길이라는 사람의 숭고한 희생이 아깝지 않도록 내 목숨도 값진 곳에 써야겠다.’ 하고 마음을 먹었을 것 같다. 백정기 의사라면 꼭 그랬을 것 같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정기 의사 귀에 상하이에 있는 육삼정이라고 하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와 중국 친일파와의 비밀회담이 이루어진다는 정보가 들어온다. 일본 고위급 관료들이 중국 국민당의 부패한 관리들에게 자금을 주고 만주 땅을 포기할 것을 회유하기 위해 모이는 자리였다. 백의사는 ‘이거다!’ 싶었을 것이다. 흑색공포단원들은 일제의 수뇌부와 중국 친일파를 한 번에 없애고 또 중국인들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침략 음모를 폭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서로 너도나도 자원한다. 죽음의 길인 줄 알면서도 서로 자원을 하여 결국 거사를 담당할 사람을 제비뽑기 했다. 그때 백정기 의사가 뽑혔다.  


그리고 백정기 의사는 말했다.  

“나의 구국 일념은 첫째, 강도 일제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
둘째는 전 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 평화 위에 세계 일가의 인류 공존을 이룩함이니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 주시오.”   


이후 백정기 의사는 함께 뽑힌 두 명의 동지 원심창, 이강훈과 함께 계속해서 폭탄 투척 연습을 하였다. 폭탄 두 개는 백정기 의사가 가지고 나머지 권총 두 자루는 함께할 동지 둘이 각자 하나씩 나눠 갖고 거사 날 백의사가 육삼정에 폭탄을 던지고 도망가면 동지 두 명이 따라오는 일제 경찰들을 쏘는 것을 끊임없이 연습했다.  


1933년 3월 17일 

드디어 거사 당일 백의사는 떠나기 직전 남은 동료들에게 죽어 저승에서 만나자” 작별인사를 하고 나섰다.  


백의사는 육삼정 거사를 진행하기 직전 자세한 현장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같은 아나키스트였던 일본인을 만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소개했던 일본인은 육삼정 부근에서 일본인 공사를 미행하여 동태를 살피기로 했는데, 국적을 넘어 사상만으로 그를 믿은 것이 화근이었다. 사상적 동지라고 믿었던 일본인은 사실은 일본 쪽에서 심어놓은 밀정이었다. 원래 그는 전과자였는데, 일본 측은 그의 약점을 이용하여, 죄를 덮어주고 경제적 편의를 제공해 줄 테니 백정기 의사를 비롯해 항일 운동을 하는 독립운동가의 동태를 잘 살피고 그들의 계획을 다 일제에게 넘기기로 거래되었다. 육삼정 계획이 일제의 귀에 들어가자 일경들은 육삼정 부근의 인력거꾼과 식당의 종업원으로 변장하여 백정기와 흑색공포단원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를 모른 채 일경의 소굴로 들어간 백정기 의사는 결국 거사를 실행하기도 전에 주변에 위장해있던 일경들에게 붙잡혀 체포되었다. 이후 백정기, 원심창, 이강훈은 나가사키로 이송되어 백의사와 원심창은 무기 징역을, 이강훈은 징역 15년 형을 언도받았다.  


비록 육삼정 사건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백정기 의사는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침략 음모를 만천하에 공개하여 중국인들의 항일의식에 큰 영향을 주어 이들의 항일전쟁을 유도했고, 한국인의 항일의식 또한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독립운동 사상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정기 의사는 끌려가는 와중에도 자신이 주동자임을 자처하며 젊은 동지들을 보호하였고, 흑색공포단의 동지들이 위험에 처해질까 봐 그들을 끝까지 보호하며 모든 것을 혼자 다 뒤집어쓴다. 이런 백의사의 성격을 잘 알았던 동지들을 백의사를 구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들였지만, 백정기 의사는 결국 옥중 순국했다. 

그때 그의 나이가 39살이다.  


떠나기 전에 백의사의 유언이다.  


"나는 몇 달 더 못 살 것 같소. 그러나 동지들은 서러워 마오.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오.
형들은 자중자애하며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겨레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라오. 평생 죄송스럽고 한 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혀지지 않을 뿐이고, 조국의 자주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 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 바라오."


백의사의 유해는 일본에 묻혀 있다가 박열, 이강훈 (백의사와 함께 육삼정 거사를 준비했던 인물) 등 아나키스트계 독립 운동가들의 노력으로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유해와 함께 일본으로부터 회수되어 1946년 7월에 국내로 들여왔다. 광복 후 조선시대 왕들에게 행해졌던 국민장으로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한 뒤 오늘날의 효창공원 삼의사 묘에 안장되었다.  




출신지와 배경보다는 사상을 우선시했던 백정기 의사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믿음이 있었던 따듯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런 그가 교과서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의사와는 다르게 낯설게 느껴졌던 이유는 그가 아나키스트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해방 이후 민족주의는 남한에서 수용이 되었고, 사회주의 노선은 북한에서 수용이 되었다. 갈 곳을 잃은 아나키즘은 양쪽에서 다 배척이 되면서 부정적인 이미지만 부각되었던 것 같다.  


백정기 의사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정부주의라는 단어가 다 함의할 수 없다. 무정부주의가 가지고 있는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뉘앙스는 구파 백정기 의사의 독립을 향한 열망을 담아내기엔 부적합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백의사의 아나키즘은 독립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사상도 국경도 굴레도 뛰어넘는 범국가적이고 아주 숭고한 것이었다. 그런 그의 사상이 한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무정부주의”라는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가 섞인 의미로 변색이 되었고, 분단되는 과정에서 어느 체제에도 속하지 못하게 되면서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이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던 것 같다.   


분단이 된 이후 이념에 있어서 자유롭지 못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사상적으로 안전한 분들이라 여겨지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집중된 교육을 하던 게 오늘날까지 지속된 건 아닐까... 그래서 똑같이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수많은 숭고한 독립운동가들을 이념적인 프레임으로 거르면서 너무 오랜 시간 외면했던 게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상대적으로 이념 논리에서 자유로운 우리 세대가 그리고 다음 세대가 이념과 사상에 가려져 외면받고 있던, 그리고 낯설게 느껴졌던 독립 운동가들을 양지로 모시고 나와 따뜻한 조명을 받게 해 드리는 게 우리의 숙제가 아닌가 싶다. 백선생 하면, 이젠 집밥 백선생이 아닌 구파 백정기 의사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간판사진 thanks to 나의 벗 신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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