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50년대 싸이클은 이탈리아에서 축구 못지 않게 인기있는 스포츠였다. 특히 도로 싸이클 경주의 인기는 대단해서 세계적인 대회를 석권한 선수들은 프로 축구단의 스타 플레이어 부럽지 않은 유명세를 누리기도 했다. 이 싸이클의 전성시대를 풍미한 선수들 가운데 거의 국민 영웅처럼 널리 사랑받았던 인물이 지노 바르탈리(1914-2000)다. 피렌체 교외의 시골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3살 때 자전거 판매/수리점의 견습 점원으로 들어갔다가 싸이클링의 재능을 발견하고 곧 선수가 됐으며 21살에는 프로에 입문한다.
산악과 비탈 코스 주행에 특히 뛰어났던 바르탈리는 프로 데뷔 첫 해인 1935년 지로 디탈리아Giro d'Italia1)에서 산악구간 주파 1등을 기록했으며(이후 1940년까지 거의 매년 이 대회에서 동구간 1위 자리를 유지), 다음 해부터는 2년 연속(1936, 1937)으로 대회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1937년부터는 세계 최고의 장거리 도로 경주로 손꼽히는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2)에 출전하는데, 첫 해에는 경기 중 부상으로 완주를 포기해야 했지만 이듬해인 1938년 대회 챔피언에 올랐다.
투르 드 프랑스에서 우승하자 바르탈리도 여러 스포츠 스타들처럼 파시스트 정권으로부터 국민영웅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독재정권이 수여하는 각종 포상과 영예를 기꺼이 누리고 과시했던 일부 운동선수들과 달리 바르탈리는 무솔리니 정부의 고위 인사들, 정계 유력자들과 교류하거나 정권의 정치선전에 참여하길 피하며 피렌체에서 조용히 지냈다. 어릴 때부터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그는 원래 소탈하고 성실한데다가 자신의 능력이나 성취를 드러내는 걸 꺼리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훗날 아들에게도 자주 이맇게 말했다고 한다. "선은 행동으로 하고 말하지 않는거다. 진정한 훈장이란 한 사람의 영혼(정신)에 달아주는 것이지 겉옷에 다는 게 아니란다 Il bene si fa ma non si dice e certe medaglie si appendono all'anima ma non alla giacca."
지노 바르탈리
성격도 성격이지만 바르탈리가 무솔리니 정권의 호의를 달가워 하지 않았던 이유는 또 있었다. 그는 원래 정치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기독교적 인본주의와 박애 정신에 반한다고 생각해 파시스트들의 폭력과 반유대주의에 내심 반감을 가지게 됐고 나중에는 비밀리에 반파시스트 활동에도 가담한다. 2차 대전이 벌어지고 4년이 지난 1943년 가을, 이탈리아는 둘로 나뉘었다. 시칠리아에 상륙해 남부를 점령한 연합군이 반도를 북상하며 진격해 오는 가운데 중부와 북부는 여전히 파시스트들과 이들을 지원하는 나치 독일군의 수중에 있었다. 나치-파시스트 치하의 피렌체에서 엘리아 달라 코스타Elia dalla Costa 대주교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과 함께 비밀리에 수 백명의 유대인들을 국외로 탈출시키는 일을 했는데, 대주교를 존경하며 따르던 바르탈리도 이 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훈련을 구실로 자신의 경주용 자전거를 타고 피렌체와 아시시 사이를 왕복하면서 그 때마다 자전거 안장 밑 파이프 속에 비밀 문서나 사진 등을 숨겨 배달했던 것이다. 특히 아시시의 수도사들이 찍은 유대인들의 증명사진 수 백장을 대주교에게 전달해 가짜 신분증, 여행증명서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결정적인 공헌이었다. 이 외에도 바르탈리는 자신의 명성과 자전거 실력을 활용해 여러 반파시스트 비밀활동을 수행했다. 산 속의 레지스탕스들을 위해 제노바 대주교에게 가는 전령 역할을 맡아주기도 했고, 수레 밑바닥에 유대인을 숨기고 자전거로 그 수레를 끌어서 스위스로 탈출시켜 준 일도 있었다. 이 때마다 바르탈리는 항상 싸이클 훈련하는 것으로 위장했고 파시스트와 나치 군경들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더욱 대단한 점은 바르탈리가 자신의 이런 영웅적 행동을 평생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한참 뒤 오직 아들에게만 아주 단편적으로 말했을 뿐이라고 한다. 바르탈리가 전쟁 중 행했던 선행과 레지스탕스 활동의 구체적인 일화는 그의 사후에야 세상에 알려졌고, 2005년 이탈리아 공화국 정부는 이를 기려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 무공 훈장(Medaglia d'oro al valore civile)을 추서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바르탈리는 선수활동을 재개했다. 전쟁 후 처음 재개된 지로 디탈리아에서 다시 한 번 우승한 것을 시작으로(1946) 그는 계속해서 여러 대회에 출전해 좋은 성적을 거뒀다. 삼십 대 중후반의 나이에도 꾸준한 그에게 이탈리아 국민들은 철인(Ironman/Uomo di ferro)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의 마지막 메이저 대회 타이틀인 1948년 투르 드 프랑스 우승은 이탈리아 스포츠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널리, 오래 기억되는 사건들 중 하나다. 대회 중반까지 선두를 달리고 있는 프랑스 선수보다 22분이나 뒤처져 있던 바르탈리의 우승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 이탈리아에서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가 벌어졌다. 7월 14일 로마에서 이탈리아 공산당의 당수 팔미로 톨리아티Palmiro Togliatti가 테러범의 총을 맞고 의식불명이 되자 전국에서 대규모 시위와 파업, 폭력 소요가 일어나고 의회에서는 의원들이 좌우로 나뉘어 연일 고성을 주고받으며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신기하게도 바로 이 때부터 투르 드 프랑스 역사에 남을 역전극이 시작됐다. 알프스 산악을 달리는 구간에 들어서자 갑작스러운 폭풍우로 많은 선수들이 구간 완주를 실패하거나 포기했고 이 때부터 연속 4구간에서 선두로 올라선 바르탈리가 대회 최종 우승까지 차지하게 된다. 바르탈리의 선두 진입 소식이 처음 전해질 때부터 이탈리아 국민들의 관심은 투르 드 프랑스 보도로 쏠리기 시작하더니 대회 우승이 확정될 무렵 시위, 파업과 의사당의 소란은 모두 사라졌고 병상의 톨리아티도 거짓말처럼 의식을 되찾았다. 바르톨리의 우승은 위기에 처한 신생 공화국 이탈리아가 첫 정치적 위기를 넘기는 데 일조한 셈이다.
1938년 투르 드 프랑스 우승 당시 바르탈리의 자전거
마흔 살에 선수생활을 은퇴한 뒤에도 바르탈리는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사랑하는 스포츠맨으로 남았다. 심지어 신앙심이 유난히 깊었던 바르탈리가 자신이 기독민주당 지지자라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아끼는 팬들 중에는 열렬한 공산주의자들도 많았다. 2000년 5월 바르탈리가 심장질환으로 사망하자 이탈리아 올림픽 위원회는 2일의 공식 애도 기간을 정하고 국내에서 열리는 모든 스포츠 경기에 앞서 그를 추모하는 묵념을 갖도록 했다.
사실 바르탈리를 제외하고도 이탈리아 스포츠의 역사에서 철인이라고 불렸던 선수들은 적지 않았다. 특히 정치적 목적으로 스포츠를 적극 활용한 파시즘 시대에 무솔리니로부터, 혹은 정권의 고위인사로부터 '철인'으로 칭송받은 운동선수들은 종목을 불문하고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지노 바르탈리야말로 선수로서의 업적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인품과 행적에서도 진정으로 영웅, 아이언맨으로 불리기에 충분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1) 이탈리아를 일주하는 도로 싸이클 경주 대회. 이탈리아의 스포츠 신문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가 투르 드 프랑스의 이탈리아 버전으로 기획해 만든 대회다. 1909년 처음 시작돼 매년 5-6월에 개최되는데 보통 21개 구간 경주로 나눠 3주 가량 진행한다. 대회 상징색은 분홍(가제타 델로 스포르트의 지면 색깔)이며 구간별로 합산한 기록이 선두인 선수가 분홍 셔츠를 입고 달린다.
2) 세계에서 가장 크고 권위 있는 도로 싸이클 경주 대회. 1903년 시작됐고 기본적인 대회 운영방식은 지로 디탈리아와 거의 동일(21개 구간, 23-24일 진행)하며 매년 7월 열린다. 대회 상징색은 노란색이며 종합기록에서 선두를 달리는 선수는 노란 셔츠를 입고 경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