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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집 Feb 20. 2019

양손 가득이라도 괜찮아

2년 동안 제주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제주에서 살았다기보다 장기여행을 했다는 말이 더 가깝다. 제주에서 긴 여행을 끝낸 지금 서울의 생활이 나는 달콤하다. 서울은 그대로다 제주를 다녀온 내가 달라졌다. 제주는 스산함이 스며드는 기나긴 밤, 비릿한 오리의 똥냄새, 어둠이 채가시지 않은 새벽에 돌아가는 경운기 모터 소리, 다닥거리며 천장을 요란하게 뛰어다니는 생쥐 발자국 소리, 끍끍 쇠 긁는 할망의 기괴한 목소리, 내감각을 극도의 긴장상태로 만드는 곳이었다. 이젠 그 모든 걸 느끼지 않아도 되는 이 순간이 나는 평온하다. 서울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다.

 
저가항공이 생긴 뒤 제주여행을 한 달에 한 번씩 갔다. 집으로 돌아오면 무엇에 홀린 사람마냥 다시 제주로 가는 비행기표를 끊고 짐가방을 꾸렸다. 그렇게 1년 반 동안 제주를 집처럼 왔다 갔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주의 갈증을 견딜 수가 없었다. 서울에서의 삶이 무료했고 제주여행은 나에게 모든 게 신세계였다. 파란 하늘, 투명한 에메날드빛바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빗방울, 풀내음이 가득한 초록세상, 노란, 빨간, 파란, 보랏빛으로 물든 꽃잎들. 처음 보는 여행자와 함께 하는 자리에는 달달하게 넘어가는 술 한잔, 혼이 빠질 듯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빨려 들듯한 흥미진진한 각자의 경험담들, 거기에 들쭉날쭉 제주의 변덕스러운 날씨까지 더해 내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제주에 점점 빠져들었다.
 
그레와 함께 지낸 뒤 부모님 집에서조차 3일 이상 잘 수없었다. 외국여행을 한두 달씩 다니던 나는 이 생활이 숨이 막혀 우울함을 느끼고 있었다. 가볍게 시작한 제주여행은 나에게 달콤한 그 자체였다. 제주여행을 하면 할수록 제주에 살고 싶은 마음의 소용돌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그레를 데리고 제주로 가면 여행도 일도 할 수 있어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아무 연고 없는 제주에 혼자 산다는 것이 알 수 없는 두려움을 갖게 했다. 이 생각들이 갈팡질팡하며 꼬리를 물더니 내 머릿속을 뱅뱅 돌았다. 제주여행 중 빈집이 있음 보러 갔다. 보증금 없이 빈집을 수리해 무상으로 사는 친구들이 종종 있었다. 제주는 보증금 없이 일 년 치 월세를 한꺼번에 냈다. 그것을 연세라고 했다. 공항 근처나 유명한 관광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오래된 시골집이라 운이 좋으면 그냥 집을 빌려주거나 50~100만 원 정도면 집을 얻을 수 있다고 들었다. 그때쯤 유명 연예인이나 중국인들이 제주에 집, 땅을 사들이고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집값도 마음대로 부르고 집 구하기도 쉽지 않다했다.
 
서울 집을 정리하고 완전히 제주에 내려갈 자신은 없었다. 여행과 삶은 전혀 다른 생활이라는 제주 이주민들의 조언과 충고가 귓가에 맴돌았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생활에 못 견뎌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나는 제주와 서울 두 집 살림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싼 집을 구해 작업실 겸 그레를 데리고 가 원하는 날만큼 지내다 서울에 가고 싶을 때 다시 데리고 가는 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제주여행 때 그레를 혼자 집에 두고 오는  불안한 마음도 놓고 싶었다.
 
그렇게 집을 보러 다니다 제주 이주에 대한 생각이 옅어질 때쯤 120만 원 연세 집을 얻었다. 중간에 소개하신 분이 말을 잘해주셔서 180만 원에서 120만 원이 되었다. 대중교통이 애매한 중산간의 아주 작은 시골마을의 귤밭 안에 나란히 집 두 채가 있었다. 한 채는 집주인 할망이 살고 한 채는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고 했다. 낡기는 했지만 관리를 잘해둬서 생각보다 깨끗했다. 싼 집을 얻었다는 기쁨에 행운이 나를 따라왔다고 믿었다. 이 집에서 겪게 될 어마 무시한 일들을 모르는 채 신이 나서 말이다. 제주에서 지내는 2년 동안 비워놓은 서울 집 관리비를 계속 내야 했고 새로운 살림살이를 꾸리느라 생각보다 많은 돈이 새어 나갔다. 시간과 정성을 들인 제주집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집주인할망과 2년 내내 부딪이며 살았다. 더 이상 제주생활을 견딜 수 없었다. 제주에 불안을 놓고 나는 서울로 왔다.
 
서울로 돌아와서 깨달았다. 양손에 무언가를 한가득 쥐고 못 놓는 나 자신이 있었다. 어깨가 왜 그렇게 무거웠는지 인상을 가득 찌푸리고 그곳에서 왜 그렇게 힘겹게 견디고 있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모든 게 극도로 불안했고 원하지 않은 일들 때문에 화가 났다. 욕심을 부렸다. 불안이 두려워 더 불안의 길로 나를 몰고 있었다. 여행 때는 모든 것이 황홀했고 삶 때는 모든 게 힘들었다. 살면서 포기 못해 힘든 마음이 생길 수는 있다. 그 경험들이 쌓여 현재의 내가 있다.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 않으면 된다. 서울 집을 정리하지 않아 제주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에 집이 있어 제주도를 완벽하게 정리하고 서울로 편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서울 집을 그대로 둔 게 제일 잘한 일이다. 포기하지 않아 힘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아 좋은 결과를 얻었다. 어느 부분을 선택하던 후회와 깨달음은 생긴다. 하나든 두 개든 나의 결정에 믿음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제주를 다녀와서 나는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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