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어색하게 내려놓고
한참을 더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이게 1년 만인가?
그때도 이 앞에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익숙하면서도 다시는 있고 싶지 않은 곳.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하지만 어쩐지 그보다 더 이상해진 지금.
연이는 말없이 앞으로 걸었다.
멀대 같은 그림자를 등지고,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막상 뇌신경외과 문 앞에 도착하니,
발걸음이 얼어붙었다.
움직이질 못하던 연이의 앞에서,
키 큰 학생이 익숙하다는 듯 먼저 나섰다.
보호자라며 서류를 건네고,
대신 이야기를 시작했다.
단발머리 여학생은 잔뜩 긴장한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두 손을 꼭 쥔 모습.
해진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가방 줘."
해줄 수 있는 게 지금은 그거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조용히 가방을 건네자,
해진은 그대로 받아 들고 조용히 앉았다.
"다음 차례입니다."
간호사의 말에 연이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표정에서 불안함이 묻어났다.
“같이 들어갈까?”
입 끝에 걸린 말은
마치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모르는 아이처럼 흔들렸다.
연이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말,
아니, 괜찮은 척이라는 말.
그저 눈빛으로만 전했다.
사실 무서웠다.
혼자 들어가기엔 너무 무서웠다.
속으로는 그가 그냥 따라와 주길 바랐다.
하지만 연이는 결국 혼자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진료실 문이 닫히고,
의자에 앉자마자 공간의
차가운 정적이 몸을 조였다.
하얀 벽, 하얀 가운.
익숙하지 않은 기계음과 타자 소리.
의사는 연이의 서류를 훑고,
간호사들은 말없이 움직였다.
탁탁, 탁.
말은 없었지만, 긴장감은 가득했다.
연이는 입술을 깨물며 기다렸다.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듣고 싶지 않으면서도 들어야만 하니까.
그러다 입이 열렸다.
“기억을 담당하는 대뇌에 손상이 있어서요.”
머릿속이 하얘졌다.
의사가 무슨 말을 더 하는지도 들리지 않았다.
정신이 붕 뜬 듯, 몸은 그 자리에 있는데
마음은 멀리 가 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할 거예요.”
현실 같지 않았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내가 아닌 누군가의 인생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러다 그 말이 결정타처럼 꽂혔다.
“가족분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건지.
왜 그런 말을, 지금 내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건지.
무너진 건 기억만이 아니었다.
마음까지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연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만 작게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료는 십 분도 되지 않아 끝났지만,
나오는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복도를 나서니
그는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떨군 순간,
참았던 눈물이 와르르 떨어졌다.
‘비가 올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진짜였다.
옥상 계단을 향해 무작정 달렸다.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옥상 문을 밀쳐 열고
벽 구석에 몸을 웅크렸다.
하늘이 터졌다.
장대비가 쏟아졌다.
소녀는 엉엉,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 같았다.
빗소리는 마치 그 울음을 감싸듯
함께 내려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옥상문이 벌컥 열렸다.
그였다.
숨을 고를 새도 없이,
그는 연이를 품에 안았다.
아무 말도 없었다.
단지 따뜻한 품이 전부였다.
세상 끝처럼 울어대는 연이를
그는 조용히 감싸 안았다.
“안 돼... 안 된다고... 나... 안 된다고…”
울음 속에 파묻힌 말들.
연이의 마음은 그 품 안에서 한참을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