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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우 Jul 01. 2024

디어 에반 핸슨, You Will Be Found

옳은 일은 아니었지만, 누군가에겐 필요한 일이었던 거야

사회불안장애를 앓는 고등학생 에반 핸슨은, 집 나간 아빠 대신 엄마, 하이디와 함께 산다. 학교 아이들에게 팔 깁스에 싸인을 부탁해 보지만, 상대해 주는 건 범생이 알라나와 '가족끼리 친한 지인' 제러드밖에 없는 데다, 짝사랑하는 여학생인 조이에겐 손이 축축할까 봐 말도 걸지 못한다. 홀로 남은 에반은 상담 선생님의 권유로 자신을 위한 편지, '디어 에반 핸슨'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쓴다. 그런데 학교에서 유명한 양아치, 코너가 그 편지에서 동생, 조이의 이름을 본 후 화를 내며 빼앗아가고 며칠 뒤, 코너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것도 코너가 가진 편지를 보고 찾아온 코너의 부모님에게서. 코너네 집 저녁식사에 초대받은 에반은 처음으로 자신이 원했던 가족의 모습을 보고 코너의 단짝 친구였던 척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 거짓말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 에반이 감당하지 못할 수준으로 커진다. 



6/19 2:30 회차 캐스팅보드


전체적으로 파란 색감을 가져가는 무대가, 시원하고 청량하면서도 슬픔이 떠오르는 뮤지컬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졌다. 공연장에 도착하면 관객들이 단체로 파란색 드레스코드를 맞춘 것 같아 보인다. 

디지털화 트렌드를 따르는 극 사이에서도 이 정도로 영상 연출 기법이 많이 사용된 극은 처음이었다. 커튼도 없고, 간단한 무대 전환으로 장면 사이 간격을 최소화하며, 일종의 이머시브 공연처럼 관객 참여 영상을 사용하는 것은 처음 보는 도전이었다. 대극장 극이라기엔 앙상블도 없으며 스케일이 크다고 느껴지는 편은 아니나, 한 명 한 명의 배우의 연기력을 극대화해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디어 에반 핸슨>의 매력이다. 인터넷이 전례 없이 활성화된 시대에 온라인 커뮤니티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표현하는 극이기도 했다. 


팝 음악 스타일이 돋보이는 대중적인 곡들과, 노래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섞이는 스토리텔링 형식이 돋보이는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은, 현실 세계를 최대한으로 무대 위에 구현함으로써 현대 배경의 뮤지컬이 가지기 쉬운 이질감을 덜어줬다. <디어 에반 핸슨>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큰 스케일의 거짓말과 감동, 드라마를 위주로 하는 스토리로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데, 내 경우에는 그 어색할 수 있는 틈을 배우들의 생생한 감정선이 채워 준다고 느꼈다. 


에반의 원맨쇼라고 봐도 될 만큼, 이 뮤지컬은 에반의 존재감이 크다. 불안장애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아니, 혼자 남겨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에반의 초라한 모습에서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에반은 어떻게든 자신을 숨기려고 몸부림친다. 거짓말을 하고 싶어서가 아닌, 자신을 조금이라도 덜 미워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Requiem'을 부르며 조이는 에반과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 세상에게 솔직해지는 것. 자신에겐 악몽과 같았던 오빠, 코너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겠다 선언한다. 코너의 엄마는 어떻게든 그의 흔적을 품으려, 코너의 아빠는 떠나 버린 아들을 잊으려 애도하지 않으려 한다. 창문 밖에서 바라본 그들은 고요한 가정일 뿐일 것이다. 그 안을 바라보며 함께하길 간절히 바라던 에반은 수면 아래의 그들을 알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 각자의 이유로 아파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디어 에반 핸슨>의 가장 큰 강점은, 인물들의 감정선이 잘 드러나는 넘버다. 대표적으로 'Waving Through A Window'와 'You Will Be Found'가 있다. 눈물이 가득 차 반짝이는 눈망울과 말하듯 노래하는 박강현 배우님의 방식이, 에반의 캐릭터에 또 다른 겹을 칠했다. 박강현 배우님의 'Words Fail'은, 꼭 내가 가슴이 터지도록 울부짖고 있는 것만 같았다. 관람 시 재미있는 팁이 있다면, 에반의 솔로곡 중 거짓말을 할 때는 기타 소리, 진실을 말할 때는 피아노 선율을 사용한다고 한다. 


비록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숨겨진 카타르시스 폭발곡은 'Good For You'였다. 외줄 타기를 하듯 위태롭게 웃던 하이디가, 에반의 거짓말을 알게 되고 배신감에 무너지는 모습은 감정의 쓰나미를 몰고 왔다. 시끄럽게 울리는 일렉 기타가 그의 친구들, 알라나와 제러드의 혼에반을 둘러싼 혼란을 구현하고 있었다. 본인이 저지른 일의 대가를 치르고 있음을 알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구하고 싶었다. 


'You Will Be Found'는 1막 마지막 곡이다. '어둠이 쏟아져 올 때', 깜깜한 무대 위에 한 줄기 빛 아래 선 에반은 자신의 그림자밖에 보지 못했다. 에반이 불안하고 아픈 것이 그의 잘못이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잘못을 하며 살아가는 거겠지. 가끔은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나와 너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상처로 얼룩진 벽을 뚫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런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런 서로를 알아보고 보듬어주는 것이라고 에반이 내게 호소했다. 


의도가 좋았다고 해서 잘못이 옳은 일이 될 수는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고, <디어 에반 핸슨>은 이야기하고 있다. 에반의 거짓말로 에반도, 하이디도, 코너의 가족도, 무언가를 깨뜨리고 넘어설 수 있었던 것처럼, 거짓으로 쌓아 올린 '코너 프로젝트'가 수많은 사람들을 '찾아준' 것처럼. 극을 감상하며 줄곧 에반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You Will Be Found" 누군가 널 찾아줄 거라고. 내가 에반에게 닿을 순 없었다. 대신에 내 주변에 혼자 아파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들에게는 닿을 수 있다. 

결국 '영원토록' 비치는 햇살의 온기를 우리 모두가 느낄 수 있기를 기원하며 <디어 에반 핸슨>은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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