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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우 Jun 25. 2024

숙제는 나에 대한 탐구

또 한 번의 자기소개

문학과 작문 교실은 작년에 임시 프랑스어 교실로 쓰였기 때문에 이미 익숙했다. 10학년 1교시 수업시간마다 지루한 프랑스어 문법 대신에 여기저기 놓인 책과 문학 관련 포스터를 감상하곤 했었다. 벽을 담쟁이넝쿨처럼 타고 오른 LED 전구와 무지갯빛으로 정리된 책꽂이가 낭만적인 곳이었다. 11학년 영어 선생님은 학교 신문사장인만큼, 작년에도 자주 뵈었다. 한 언니는, 절대 쉬운 분은 아니지만, 워낙 열정적으로 연구를 하시는 선생님이니 믿고 따라가라는 평을 해주었다. 제대로 된 영어를 배우겠다고 온 유학이니, 이 수업만큼은 내 걸로 만들겠다는 각오로 임하기로 결심했다. 


AP Literature & Composition 수업은 10학년 영어와 굉장히 다른 뉘앙스를 풍겼다. 뭐든 좀 유하게 넘어가는 작년의 선생님과 다르게 체계적이고 꼼꼼한 선생님이시기 때문인지, AP 커리큘럼에 맞춰 더 빡빡해진 수업량 때문인지, 전엔 쉬어가는 시간 같았다면 이제는 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우리가 이번 학기에 할 책만 해도 The Crucible(시련), 1984, 그리고 Beowulf(베오울프)로, 극본, 소설, 신화를 모두 맛볼 수 있었다. 한 가지 방식에 익숙해질 때쯤이면 바로 새로운 방식에 적응해야 했다. 


첫 수업시간, '소녀처럼 글을 쓰자'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는 문을 통과하자 에어컨 바람과 디퓨저 향이 섞인 공기가 나를 감쌌다. 모둠 형태로 배치된 책상들 중 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항상 그렇듯이 너무 일찍 온 탓에 방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작년과 같이 불은 꺼져 있었고 커다란 램프 몇 개가 교실을 따뜻한 색으로 밝히고 있었다. 

이 학교에서 보낸 일 년이란 시간의 여운을 만끽하며 감성에 젖으려던 그때, 선생님이 처음 보는 남자애와 함께 들어오셨다. 선생님의 통통 튀는 에너지와 빠른 걸음에, 뒤따라오는 조그만 애의 나무늘보 같은 기운이 대비되어 웃음이 나왔다. 너무 작고 어려 보여서 더 아랫학년인 줄 알았으나, 슬며시 엿들은 바로는 우리 학년의 전학생이라고 했다. 속사포처럼, 그러나 친절하게 안내를 끝낸 선생님은 

"오, 너도 있었네! 이번엔 내 학생이니까 기대한다!"

라고 급히 외치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소심하게 구석에 앉은 그 애를 보고 있자니, 작년에도 1교시에 그곳에 똑같이 앉았던 내 모습이 오버랩되어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안녕, 이름이 뭐야?"

"산티아고. 막 전학 왔어."


수업이 끝나자마자 한숨을 쉬며 교실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첫 번째 날은 항상 피곤하다. 나를 가장 피곤하게 만드는 원인은 '자기소개'겠지. 올해 우리의 과제는 빙고판 모양을 우리에 대한 정보로 가득 채우는 것. 선생님의 빙고판에는 민트색, 닥터 페퍼, 해리 포터 등등이 적혀 있었다. 자기소개 과제를 바탕으로 에세이를 쓰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빙고판을 이루는 조그만 사각형 열여섯 개가 그렇게 광활해 보일 수가 없었다. 해가 지날수록 나를 아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된다. 이제 나는 처음 보는 전학생에게 선뜻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지만, 전과 같이 매일같이 계획표를 짜는 사람은 아니다. 수도 없이 전과 다른 내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으면서, 익숙한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때면 모순적이게도 심경이 복잡하다. 

'뮤지컬 광팬'

'김치볶음밥'

'블랙'

'유학생'

... 창의력 좀 발휘해 봐라.

'해리 포터'

'웃는 남자'

'레미제라블'

...'이야기'

결국 내 중심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이야기에서 오는 감동이다. 감동을 주는 이야기꾼이 되고자 하는 소망도 여전했다. 내 에세이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을 다루기로 했다. 제목은 '토종 한국인의 아메리칸드림'으로 정했다. 또 한 번의 자기소개를 하며, 나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가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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