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이제 포르쉐 UX 디자이너가 들려주시는
친구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인데 PUI(Physical User Interface)를 포함해 자동차의 실내외의 여러 도구와 장치의 역사를 흔적기관의 원래 쓰임세를 더듬어 보듯 알려주는 책이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형태와 사용을 띄게 되었는지 작가가 알거나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현업의 가벼운 일화와 함께 소개해주는데 나같이 박물과적인 지식 엿보기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환영할만한 책이었다.
지난 100년간 자동차의 인터페이스 변화를 보며 "와 이거 내 프로젝트에 적용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달라진 건 기술과 제약 조건이고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니즈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 글에서는 책에서 소개해준 재밌고 흥미롭다 생각한 몇몇 장치들과 나름의 인사이트를 공유하고자 한다.
1. 자동차와 꽃병
2000년대 중반에 출시한 폭스바겐사의 뉴비틀에는 꽃을 놓을 수 있는 꽃병이 설치되어있다고 한다. 그냥 노이즈 마케팅 수단이나 펀카의 이미지를 위한 재미 요소일 수도 있지만 차와 꽃병은 꽤나 오랜 역사가 있다고 한다.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는데 1900년대 초반에 차에서 나는 냄새를 덮기 위해 꽃의 향을 이용했다는 설과 뭐라도 남들과 차별적인 운전자의 개성을 보여주는 요소로 꽃병을 사용했다는 설이 있다.
이러한 꽃병은 자동차 부품샵이 아닌 주얼리샵에서 팔았고 지금의 애프터 마켓에 해당되는 제품이었다고 한다. 현재에는 차량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차량 방향제와 개성표현을 위한 범퍼스티커로 진화했다. 흔적기관 같은 과거의 장치를 리바이벌했다는 점과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유효한 차별화에 대한 욕구... 둘 다 재미있는 지점이다.
2. 소수점 단위의 차량 내 온도조절
1964년 캐딜락에서 최초로 온도조절이 가능한 차를 출시했고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다이얼 인터페이스를 통해 차량 내 온도를 대략적으로 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1996년에 출시한 BMW E38부터 소수점단위로 온도를 조절하기 했다고 한다.
차량 내 온도를 소수점 0.5 단위로 조절하는 게 과연 유용한가(사용자와 공급자 모두에게)는 둘째치고 왜 그런 기능을 제공하게 되었을까?
책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제시된다.
1. 다이얼 인터페이스는 정확한 온도를 못 맞추게 한다. "나"에게 적합한 온도가 있을 텐데 그저 가늠하여 맞춰야 한다.
2. 화씨(°F)와 섭씨(°C)의 연동문제. 화씨는 쓰는 곳과 섭씨를 쓰는 국가 모두에 수출할 텐데 그 둘을 연동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나는 사용자 입장의 첫 번째 이유도 흥미롭지만 공급자 입장의 두 번째 이유는 생각지도 못해서 꽤나 흥미로웠다. 화씨에 맞춰 시스템을 만들면 그냥 섭씨로 바꿀 때 대략 0.5도씩 조절하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씨로는 1도씩 조절되고 섭씨로는 0.5도씩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3. 벤츠 시트조절
혹시 위 사진과 같은 시트조절 인터페이스를 본 적 있는가? 운전석과 조수석 시트를 조절할 때 사용하는 버튼들이다. 딱 봐도 뭔지 딱! 알 것 같지 않은가? 나는 이 인터페이스를 처음 보고 "정말 기깔나는 인터페이스군"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내게 좋은 인터페이스의 모범을 보여준 조작부가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이 책에서도 소개되었다. [교과서가 된 시트 조절 스위치]라는 챕터에서 소개되는데 이러한 조작 방법은 오랜 기간 벤츠가 특허를 내어 고유하게 사용해 오다가 이제는 거의 대부분의 메이커에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 인터페이스가 왜 그리 뛰어난 걸까 생각해 보면 몇 가지 킥이 있다.
1. 눈으로 보지 않고도 손으로 더듬어 그 모양을 가늠해 조정할 수 있다.
2. 시트의 옆면모양을 그대로 본떠 만들어서 직관적이다 (내추럴 매핑, 멘탈모델 구성)
3. (2번과 이어짐) 시트와 나란히 매칭되게 만들어 헷갈리지 않는다.
나는 이런 멋진 인터페이스를 보면 가슴이 뛴다(리얼이다).
4. 스포츠카만의 디테일들
스포츠카 외관뿐만 아니라 UX 디자인에 있어서도 스포츠카의 스포티한 감성을 녹이는 것도 중요한 고려점이라고 한다. 어떻게 감성적인 "기분"을 내게 할 수 있을까? 과거 스포츠카는 기계식 장치들로 사용자가 직접 차를 제어해 가며 조종할 수 있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각종 디지털 장치들이 이를 대체해 인터페이스만 남았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도 스포츠카의 감성적 측면 자극하기 위해 일부 스포츠카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장치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1. 패들 시프터 : 공간을 줄이기 위해 핸들에 장착한 수동 변속 장치
2. 도어 풀 스트랩 : 경량화를 위해 끈을 이용해 차문을 열수 있는 스트랩
3. 시프트 라이트 : RPM게이지를 제대로 보지 않고 힐끗 봐도 알 수 있게 만든 시각적 장치
물론 기능적인 효익을 주는 장치들이겠지만 차를 타고 출퇴근을 하거나 근교 여행을 가는 현대 소비자에게는 스포츠카 "기분"내기를 위한 요소 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 기분내기가 구매를 결정짓는 주요한 요인일 수 있다!
5. 키패드 배열
현대적인 차(가령 테슬라?) 중 일부는 전자 키를 활용해 차를 연다고 한다. 하지만 포드는 80년대부터 시큐리코드(Securicode)라는 비밀번호 패드를 활용해 차 문을 개폐했다고 한다. 근데 이 키패드의 재미있는 지점은 숫자 0~9가 배열되어 있지만 버튼 하나에 2개의 숫자를 적은 것이다! 공간상 제약으로 10개의 숫자 버튼을 모두 만들 수는 없지만 사용자의 숫자 조합(가령 생일이라던지)을 배려해 10진법에 사용되는 모든 숫자를 넣어준 것이다. 만약 내가 설정한 비밀번호가 0521이어도 실제 누르는 버튼은 9612와 똑같은 것이다! 이런 방식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 흥미롭게 봤다.
6. 스크린보단 VR?
스크린이 점점 자동차를 뒤덮고 있다. 그럼 자연스레 창 밖을 볼 기회는 줄어들고 그럴수록 멀미가 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실제 내가 물리적으로 이동하는 것과 내가 인지하는 것 사이의 차이에서 발생한다고 하는데 스크린이 많아질수록 그걸 인지할 단서가 줄어드는 셈이다.
그래서 저자는 오히려 VR이 멀미에 더 강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치 차의 물리적 부분이 투명해 보이는 가상공간 속에 사용자를 놓는다면 멀미가 해소될 것이라는 것이다. 정말 그럴지는 잘 모르겠지만 멀미의 대명사인 VR로 그런 게 가능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새로웠다.
1. 운전자가 쓰면 쓸수록 애착을 가지게 될 요소란 무엇일까?
사람이 쓰면 쓸수록 애착을 느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들이 있다. 누군가에겐 차도 그런데 "붕붕이" 같은 별명을 붙여주기도 하는 것 같다(나는 아니다). 애착 같은 감성적 효익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까? 이전에 읽은 노먼 선생님의 [감성 디자인]을 돌이켜보면 아마 회의적 단계의 경험일 것이다. 추억이나 뜻 갚은 의미는 각 사용자가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다. 누군가에겐 볼품없는 것도 또 누군가에겐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이다(내 새끼가 귀하듯).
어떤 메커니즘으로 소중한 물건이 탄생하는지 나는 매우 궁금하다.
2. 레거시의 형태
과거 클래식 카의 요소가 현대에도 그대로 내려져 오는 것을 '레거시의 형태'라 표현하며 대시보드의 기원을 알려줬다. 어떤 것은 별다른 기능적 효익 없이 그저 과거에 그랬다는 이유로 그대로 이어져오는 것이 있다. 나는 시계나 의류도 좋아하는데 그 카테고리의 제품도 그런 부분이 있다. 가령 밀리터리 복각의류에서 어떤 특정한 박음 패턴, 주머니라던지 혹은 2차 대전 독일 비행기 항법사 시계인 플리거 시계의 12시 방향 삼각형이라던지... 대략적으로는 기능이 크게 중요하지 않은 분야의 특징인 것 같다. 근본, 전통을 따지는 마니아가 많은 부류의 특징이려나.
3. 터치스크린만이 진보적/미래적 해답이 아니다
터치스크린, 디지털 디스플레이의 증가는 책 전반에 언급되는 내용이다. 그중 흥미로웠던 부분은 터치스크린만이 진보적 방식이며 미래 자동차는 단순히 기존 인터페이스를 디스플레이로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일단 스크린으로 뒤덮인 차를 타보고 싶다. 그래야 어떤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아날로그 인터페이스가 주는 특유의 감각을 더 잘 활용할 방법이 있을 것 같다(옛 라디오의 FM주파수 조절 슬라이더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