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등장하는 제품 톺아보기
초등학생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초등학생 때 개봉한 한강에 괴물이 나오는 영화가 그 시작이었던 것 같다. 그 후 스타워즈, 엑스맨 시리즈 등등 남자애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들을 봤다. 학창 시절에는 겉멋이 들어서 고다르 영화를 좋아하는 척도 해보고 왕가위를 비주얼리스트라고 무시하기도 했다(부끄러운 일이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들뢰즈의 책에 나온다고 하는데 이 문장의 의미는 각자 다르게 해석할 것이다. (들뢰즈를 읽지 않은 나는) 더 이상 진실되지 않은 실재의 사막과 같은 세상이 보다 더 진실되기를 바라는 문장이라 생각했다. 아직도 출처가 정확하지 않은 어떤 책에서 읽은 한 문장이 인상 깊어서 기억하고 있다(아마 또 고다르였던가;;). "몹시 긁혔을지언정 35mm 기다란 장방형이 실재세계 전체의 명예를 구한다" 이 문장을 먼저 접해서 그런 걸까 들뢰즈의 문장을 영화의 대단함을 변호하는 문장으로 해석하고 싶다.
영화는 절대 세상을 구할 수 없다(명예는 또 모르겠다)! 하지만 몇 사람쯤의 삶은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지나도 영화를 보는 사람이 계속 있다면 분명 그럴 거다. 이렇듯 영화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관객들과 다양한 관계 맺기를 한다. 이 글의 소재가 되는 영화 [그녀]도 그 일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영화이다.
신나서 영화 전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했다. 영화 [그녀(Her)]는 학창 시절에 재밌게 본 영화이다. 아케이드 파이어와 케렌 오의 음악, [존말코비치 되기]와 [어댑테이션]으로 유명한 스파이크 존스 감독 그리고 인공지능 OS와의 사랑을 다루는 로맨스영화라는 모든 요소가 이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든다. 이미 충분히 좋아할 만한 부분이 많은데 이게 다가 아니다. 이 영화가 특별했던 이유는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는 상식적이지는 않은 일을 설득하는 높은 설득력인데 그 설득력은 미래의 세계를 그리는 방식이 도와주는 것 같다.
이 영화는 2014년에 국내 개봉을 했고 2025년 로스엔 젤러스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촬영은 상하이에서 했다). 2025년, 바로 지금이다! AI기술은 이제는 우리의 일상 깊숙이 자리 잡았다. 이 영화를 다시 보기에 매우 시의 적절하다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에 나오는 미래 사회는 뭐가 다른가? 다른 SF장르 영화보다 더 일상적인 미래 모습을 보여준다. 기술이 적용된 사회가 과시적이지 않고 원래 그런 사물이고 서비스인 듯 자연스럽게 등장인물들의 일상에 위치한다. 많은 미래 배경의 영화들은 미래 기술을 뽐내며 보여주기도 하고 미래의 인공물들은 모두가 기대하는 "하이-테크적이고 매끈한"미래를 묘사한다. 대부분의 미래 배경의 영화는 미래 세상을 기술에 잠식당한 디스토피아로 다루거나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정적인 입장을 전제로한다(블랙미러 시리즈나 블레이드 러너, 애니메이션으로는 사이버펑크 엣지러너가 그렇다).
하지만 [그녀]의 배경은 미래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다가올 미래를 비판하고 우려스러운 눈으로 보는 대신 자연스럽게 다가올 10년 뒤의 일상을 상상한다. [그녀]에 등장하는 미래는 기존 SF영화가 당연하듯 하는 기술이 바꾼 미래에 대한 거대담론을 거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에 집중하며 묘사한다. [그녀]의 프로덕트 디자이너인 배럿 K.K. 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에서 모두 기술에 집중하지 그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의 경험을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 생각에 이 영화의 마법은 여기에서 나온다.
보통 사람의 일상을 이루는 건 사람, 공간 그리고 물건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일상 사물들은 이 영화가 만들고자 하는 세상을 강화한다. 컨셉추얼 한 기술을 뽐내는 제품이기보다 이미 10년 전부터 써오던 물건인양 편안하게 사용된다. 이 글에서는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사물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 싶다.
왜냐하면 이영화가 특별해지는 이유에는 등장하는 뭔가 복고적인 스타일을 가진 사물들의 지분이 작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들의 복장만 보아도 의도적인 복고풍을 연출했다는 걸 바로 알아챌 수 있다.
(주인공의 이름이 시어도어인데 수염도 그렇고 묘하게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부분도 이영화가 풍기는 복고적인 분위기에 기여한다.)
영화에는 다양한 사물과 공간이 등장하지만 내 눈에 띄는 것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들만 남겼다.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인터뷰를 보면 기술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최대한 방해하지 않는 것을 지향했다고 한다. 거기에 있어서는 성공한 것 같다. 그렇게 하기 위해 먼저 도로 위 자동차를 없애야 했다고 한다. 자동차가 등장하는 순간 미래의 자동차여야 하는데 관객들은 모두 거기에 관심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당장에 나도 엑스맨 시리즈의 영화 [로건]에 등장하는 미래 캐딜락에 온 관심을 빼앗겼었다). 그래서 지상 보행로가 건물 사이를 잇는 중국 상하이를 촬영 로케이션으로 선택한 것이라 한다.
1. 핸드폰과 이어폰
프로덕션 디자이너로 참여한 배럿 KK의 코멘트에 따르면 오래된 성냥갑 등 옛 물건들에서 디자인 단서를 찾았다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작은 주소록, 담배 케이스, 라이터 등을 디자인하던 시대를 받아들였습니다. 손에 들고 다닐 수 있고 촉감이 좋은 물건들이었죠." 그 이유는 미래적인 개념에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여 작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깎아내리고 싶지 않았기에, 그들은 과거를 돌아보기로 했다고 했다. 힌지가 그대로 노출되고 사이즈나 비율까지 복고적인 스타일의 핸드폰에서 그가 한 말이 이해된다. 힌지 구조뿐만 아니라 외부의 소재적인 측면도 가죽등을 활용해서 수공품이나 명품이 떠오른다. 근데 그래서 연출적인 분위기 말고 힌지가 있어서 좋은 점은 무엇일까? 내가 이해하기로는 핸드폰을 세울 수 있다는 점인데 뭔가 당위가 조금은 약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덕분에 연락 등이 오면 틈새 사이로 빛이 새어 나와 시그널을 준다. 전면 스크린 전체가 빛나는 것보다 이편이 더 연락을 확인하고 싶게 만든다(우상단 사진).
또, 핸드폰에 사용하는 이어폰은 줄이 없어서 동작이 자유롭다. 애플의 아이팟이 등장하기 몇 해 전 영화라 당시에는 무선이어폰이 표준이 아니었다. (찾아보니 상용화된 최초의 무선이어폰은 2008년의 젠하이저이고 에어팟은 2016년 12월이다) 어디에서든 화면을 보지 않고도 단순히 이어폰을 끼는 걸로 AI 상대를 호출한다. 귀에 넣는 것 자체가 호출을 위한 인풋일 수 있을듯하다.
2.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영화에서 컴퓨터와 컴퓨터 소프트웨어도 이따금 등장한다. 기존 OS와 조금 다른 그래픽을 보여준다. 먼저 영화는 시작부터 다른 사람의 편지를 대필해 주는 회사인 BeautifulHandwrittenLetters.com의 작가로 주인공이 목소리로 말하면 편지가 써지는 시스템이 보여진다. 포토샵과 같은 인터페이스에 편지 주인공들의 자료가 보이는데 발화자의 감정을 최대한 몰입시키려는 듯 실제 종이와 같은 대지에 편지 의뢰인과 같은 필적으로 보이는 손글씨가 유려하게 쓰인다.
영화에 나오는 컴퓨터 OS는 디지털 공간의 깊이를 보다 적극적이게 활용하는 듯 보인다. 바탕화면의 아이콘도 1열 종대로 깊이감 있게 보여주고 심지어 저 너머에 지평선도 보인다. 기존 데스크톱 메타포는 말 그대로 "책상 위"를 평면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대한 반항이지 않을까 싶었다. 컴퓨터 하드웨어의 하우징도 흥미로웠는데 주인공이 사용하는 모니터 대부분은 나무 소재로 덮어져 있었다. 덕분에 하이 테크적이지 않은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또 컴퓨터에 데이터를 입력하는 방식은 대부분 사람의 목소리로 조종한다. 키보드나 마우스 인풋은 찾아볼 수 없고 만역 빠른 조작이 필요하다면 모니터 앞을 단순히 손으로 터치해서 인식시킨다. 이 부분은 아마 맥북의 트랙패드의 사용과 매우 유사해 보였다. 다만 트랙패드 하드웨어가 없이 그냥 평평한 곳에서 제어한다.
3. 집의 엘리베이터
사실 영화를 처음 볼 때 기억에 가장 남았던 건 이 엘리베이터다. 등장인물의 집은 숲 속에 있지 않다 도심에 있다. 하지만 마치 숲에 있는듯한 분위기를 나무의 그림자를 활용해서 연출한다. 엘리베이터가 위로가면 이 그림자도 거기에 맞게 모션을 취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거주자들을 위해 마치 숲인양 연출을 하는 것도 흥미로운 배려이지만 그걸 직접적인 숲의 이미지가 아닌 그림자로 보다 은유적이게 표현했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여긴 진짜 숲일 수 없다. 모두 그걸 알고 있다. 그래서 직접적인 숲의 표현은 자뭇 노골적인 볼거리,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테마파크적인 연출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은유적이고 모호한 그래픽은 보다 앰비언트적으로 전달되어 사용자의 주의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편안하게 한다.
4. 비디오게임
비디오게임도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먼저 게임에 등장하는 꼬마가 저급한 욕을 너무 잘해서 귀여웠던 게 가장 인상 깊었다. 심지어 게임 밖 외부 환경(사만사의 존재 등)을 지각-인지해 반응하기도 한다는 부분 놀라웠는데 이 세계에서는 많은 디지털"존재"들이 지능을 가진 게 기본인 것 같았다. 이 부분이 당연히 사람과 같은 지능을 가질 걸로 기대되는 사만사의 경우보다 더 신기했던 것 같다.
또, 주인공은 별도의 콘솔과 같은 인풋 기기 없이 자신의 손으로 게임 전체를 플레이하는 모습도 재밌었고 게임 중간에 핸드폰 정보를 확인할 때 자연스럽게 이 홀로그램과 연동되어 정보를 학인 하는 부분도 흥미로웠다(위 사진 맨 아래 사진 2장)
5. AI OS 사만다
마지막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인공지능 OS인 사만사이다. 사만사의 첫 등장은 이 소프트웨어를 다운로드하는 걸로 시작한다. 이때는 컴퓨터에서 진행되고 우리가 모두아는 그런 로딩 과정을 거쳐 사만사가 등장한다. 그 이후에는 그녀의 존재는 오직 목소리를 통해서 인식할 수 있다. 고정된 몸이 없는 완전 소프트웨어적 존재라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인공지능과의 로맨스를 더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목소리나 음악은 우리가 어디를 보든 무엇을 하든 항상 동시에 받아드릴 수 있는 매체이다. 밥을 먹을 때, 잠을 자려 누웠을 때는 물론 운동을 하거나 일을 할 때도 청각은 열려있다. 이런 부분에서 인공지능의 존재를 목소리 중심에 둔 것은 똑똑한 선택 같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눈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시어도어의 셔츠 앞 포켓에 항상 핸드폰 카메라가 앞을 향하게 위치시켜 둔다. 이렇게 하면 내가 바라보는 방향을 그녀도 볼 수 있다. 이런 부분은 최근 새로운 폼팩터의 AI로 소개되는 목걸이(프렌드), 클립(AI핀) 그리고 안경(메타 레이밴)에서도 고려되는 부분이다.
또, 접히는 핸드폰의 힌지 덕분에 핸드폰 카메라를 세워둘 수도 있다. 오직 이걸 위해 핸드폰을 접을 수 있게 디자인할 걸까..
[참고]
https://thenearlynow.com/designing-the-future-of-her-b865347a8895
https://www.alexsteffen.com/designing_the_future_of_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