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성이 있는 인간-사물 인터랙션을 설득해 주는 도구가 되어주길...
intro
연말에는 좀 쉬었지만 그 직전까지 다양한 자료들을 보며 재미있게 공부하고 있었다. 그중 한동안 잊고 살았던 현상학이라는 철학 사조와 깊은 연관이 있는 분야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오늘 이야기할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이다.
비슷한 시기, 이모셔널 디자인에 관한 논문을 읽게 되었다. 그 논문의 핵심 중 하나는 사람이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을 보다 추상화해보면 인공물에 인코딩 된 정보를 사람의 감각으로 지각한 다음에 뇌에서 그 의미를 디코딩되어 정보가 전달된다는 내용이다(나중에야 그 내용이 정보처리이론을 큰 프레임으로 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이걸 읽으며 사람을 하나의 컴퓨터로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I/O(인풋/아웃풋) 센서 다발과 연산을 위한 CPU로 이루어진 존재로 환원해 볼 수 있다는 부분이 흥미로웠다.
누군가에게 컴퓨터를 설명할 때 사람의 신체로 비유해서 설명하곤 한다. CPU는 인간의 머리고 모니터는 얼굴이고 등등.... 또, 인간은 생존 기계인가? 하는 질문을 친구들끼리 하고는 하는데 이건 그런 철학적, 존재적 논의 이전에 사람의 메커니즘을 기계로 이해하는 접근이 꽤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는 부분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할 체화된 인지는 사람의 뇌에서 추상적인 연산으로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는 존재로만 해석하는 것을 반대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사람의 정신보다는 신체에 그 중요성을 높이고자 하는데 나는 그게 썩 마음에 들었다. 왜냐면 신체, 물질이 정신에 먼저 한다는 게 내가 애증 하는 디자인의 가치를 더 높이기 때문인 게 첫째이고 디자인 중에서도 오직 시각을 통해 정보를 감각하는 디스플레이 중심의 경험이 갑갑하고 재미없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체화된 인지에 대한 한글 자료들을 찾던 중 성균관대 심리학과의 이정모 교수님의 논문을 읽게 되었다.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접근과 학문 간 융합]이라는 2010년 논문인데 이정모 교수님은 한국에 거의 처음으로 체화된 인지 개면을 소개하신 인지심리/인지과학 연구자라 고한다. 아무튼, 논문은 체화된 인지의 역사적 발전 과정과 철학과의 접점에 대해 다뤄서 (나 같은) 입문자가 개념을 이해할 때 적절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본 논문의 핵심 내용과 내가 흥미로웠던 내용을 두루두루, 다소 너저분하게 정리해 볼 생각이다. 보다 깊은 관심이 있는 사람은 비루한 이 글보다 논문을 읽어보기를 강력 추천한다 (짧고 많은 배경지식을 요하지는 않는다).
먼저, 인지과학이란 무엇일까?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철학의 중심 주제였다. 하지만 19세기 무렵, 과학이 세분화되면서 ‘마음’ 연구도 실험과 측정을 기반으로 한 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분리되어 나왔다. 이때부터 마음은 철학적 사유의 대상에서 벗어나, 눈에 보이는 행동과 실험적 데이터로 설명되는 과학적 주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오랫동안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핵심이라고 여겨졌던 ‘마음 그 자체’가 연구에서 사라졌다는 점이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관찰 가능한 행동만을 과학으로 인정했고, 마음은 측정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아예 연구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던 흐름을 뒤집은 것이 1950년대의 인지혁명(Cognitive Revolution)이다. 이 혁명은 마음을 다시 과학의 장으로 끌어오면서도, 새로운 언어를 사용했다. 바로 ‘정보 처리’라는 개념이다. 인간의 마음, 뇌, 그리고 당시 등장하던 컴퓨터가 동일한 방식의 정보처리 체계를 가진다는 생각이 등장했고, 이 관점은 여러 학문을 하나로 묶어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이라는 새로운 융합 학문을 탄생시켰다. 아래 본 논문에서 제시하는 인지과학의 정의를 보자.
인지과학은 1) 마음(Mind), 2) 뇌(Brain), 3) 이 둘에 대한 모형이며 또한 인간이 마음이 만들어낸 각종 인공물의 정수인 컴퓨터(Computer) 그리고 4) 인간 마음과 몸의 확장의 부 분들이요 대상인 기타 인공물(언어, 문화체제 등의 개념적 인공물과, 각종 기계 등의 물질적 인공물 포함)의 넷 각각에서,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정보적, 인지적(지식 형성 및 사용적) 활 동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접근과 학문 간 융합, 32페이지
초기의 인지과학은 마음을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계산 과정’으로 바라봤다. 표상(representation), 계산(computation), 알고리즘, 입력과 출력 같은 개념들이 인간 인지를 설명하는 핵심 언어가 되었다. 이 패러다임은 디지털 시대의 문을 연 중요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정신을 표상들에 작용하는 계산장치로 보는 데카르트-홉스적 통찰력(학창 시절 배웠던 "통 속의 뇌"를 기억하는가?)에 자극되어, 컴퓨터과학자들은 인공 지능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인지과학이 탄생했다고 한다.
이러한 인지과학의 탄생은 컴퓨터를 비롯한 인공물에 대한 관점, 세계관에 있어서 하나의 발상의 전환을 가져오는 큰 사건이었다고 한다. 마음과 컴퓨터를 동류의 정보처리 시스템으로 본다는 생각은 인 류 역사에서 하나의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내 마음에 들었던 구절은 인지과학은 "마음과 각종 지(知)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종합과학"이라는 문장이었다.
그럼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질문이 다시 제기된다. 정말 마음은 머릿속에서만 작동하는가? 몸이나 환경은 단순한 주변 요소일 뿐인가? 이 질문에서 출발한 것이 바로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이다. 체화된 인지의 핵심은 단순하다. 우리는 세상을 머리로만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몸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사람은 머리(뇌)로만 생각하지 않고, 몸과 환경을 통해 생각한다는 주장이다. 뇌 안에서만 일어나는 추상적 계산이 아니라 몸의 움직임, 감각, 물리적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해석이다.
몸짓, 감각, 움직임,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와 환경까지 모두 인지의 일부를 구성한다. 스마트폰, 언어, 노트 같은 것들이 단순한 ‘보조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사고 과정에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도 이 관점에서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이런 부분에서는 마셜 맥루한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미디어의 핵심은 미디어가 무엇을 담고 있는지보다 인간의 감각을 확장하는 힘이 미디어 그 자체에서 나온다는 유명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러한 지점에서 체화된 인지는 기존 데카르트적 관점인, 몸과 뇌를 분리시키고 인간의 뇌 속에서 모든 추상적인 연상과 정보작용이 일어난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탈 데카르트적 움직임이라고 한다. 환경과는 독립된, 한 개인 마음 내부에서 일어나는 정보의 인지적 표상이나 처리가 아니라, 환경과 괴리될 수 없이 환경-몸-뇌가 하 나의 통합적 단위를 이루는 통합체(Nexus)라고 본다.
이 흐름 속에서 확장된 마음(Extended Mind)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결국 체화된 인지는 마음을 다시 몸과 세계 속에서 작동하는 과정으로 되돌려 놓는다. 몸이 환경으로서의 세상과 하나가 되어 적응하는 과정에서 몸이 하는 행위 하나하나가 마음을 구성한다고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소 실체가 없고 두리뭉실하게 느껴진다면 그 감상이 맞는 것 같다. 저자도 글에서 아직은 통일적인 종합적 틀을 이루지 못하고 다소 산만히 여러 이름 하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아이디어는 충분히 다양한 분야, 특히 디자인과 HCI 분야에서 주요하게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인간과 인공물 간의 관계를 설명할 때 더욱 두드러지는 것 같다. 아래 내용을 참고하면 보다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인류 진화의 역사를 되살펴 본다면 인간의 진화는 순수한 인간 신체적 진화, 마음의 진화의 역사라고 하기보다는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물과 인간의 마음, 그리고 몸이 공진화해 온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인공물을 만들고 활용한다는 일방향적 활동에 의하여 인간의 진화가 이루어졌기보다는, 이와 함께 인공물이 인간의 신체적, 심리적 활동을 확장시키고 또 제약하기도 하는 쌍방향적 상호작용 과정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테크놀로지의 가속적 발달에 근거한 미래예측에서, 가까운 미래에 인공물의 정수인 컴퓨터가 인간의 지적 능력을 넘어서고 기계와 인간의 경계가 애매하여지는 특이점(The Singularity)이 2030년경에 도래할 수 있다는 레이 커즈와일(2007) 등의 논의를 고려하여, 신체적으로 그리고 심리적 측면에서 인공물과 인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미래 시점을 생각한다면, 마음에 대한 개념화와 탐구에서 인간 마음과 역사적으로 공진화해온 또 앞으로도 그럴 인공물과의 상호작용 측면을 도외시할 수 없다. -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접근과 학문 간 융합, 42페이지
체화된 인지의 관점이 도입되면 인공물의 의미 또한 달라진다. 스마트폰, 디지털 도구, 가상공간과 같은 인공물은 단순한 외부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인지를 ‘연장·확장하는 마음(생각에 관여하는)의 일부’로 작동할 수 있게 된다. 인공물과 인간의 마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함께 작동하는 하나의 통합적 단위를 형성한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학문 간 융합의 필요성을 드러낼 수 있다. 그동안 분리되어 발전해 온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 예술은 더 이상 각자의 영역에 머무를 수 없으며, ‘체화된 인지’라는 공통의 틀을 중심으로 수렴될 필요성을 갖게 된다. 실제로 철학자뿐 아니라 로보틱스, 물리학, 복잡계 이론 연구자들, 그리고 예술 분야에서도 이러한 변화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HCI를 포함한 공학 분야에서는 인공지능과 로보틱스가 체화된 인지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은 본질적으로 감각·운동 중심의 활동이기 때문에, 기존의 디지털 기기와 인터페이스 디자인은 체화된 인지 관점에서 대대적인 재검토가 필요할 수 있다.
https://youtu.be/F_anGqabDR0? si=Qe_3 muxzQRm4 ahmw
결국 체화된 인지는 인지과학을 넘어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 공학, 자연과학을 연결하는 중심 개념이다. 이는 학문 간 융합을 억지로 모색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강력한 아이디어이고, 미래 학문과 기술, 그리고 인간 이해의 방향을 제시하는 패러다임이 될 수도 있다.
오늘날 인간과 AI의 관계를 바라볼 때도 이 관점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인간 지능의 본질을 사유해 보면 ‘지능’이란 계산 능력만으로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체화된 인지는 결국,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틀이 될 수 있다.
Tangible 인터랙션을 다루는 여러 논문에 이 개념이 이곳저곳 등장한다. 하지만 아직 이 개념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는 것 같다. 느낌적으로는 이해하지만 그래서 이런 게 진짜 있고 나는 이걸 활용할 것이다! 이런 생각까지는 안 드는 게 사실이다. 이번 기회에 여러 공부를 해나가며 앞으로 보다 정확하게 이 개념을 설명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