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을 무無? 가득할 만滿!
내가 졸업한 성보중학교는 관악구에서 나름 명성이 자자하던 사립중학교였다. 80년대에 개교한 학교인데 수영장이 있어 체육시간 실기로 수영종목이 추가된 것만 보아도 얼마나 앞서간 학교인지 알 수 있다. 오늘은 1989년 중학교 1학년으로 입학했던 나를 겁에 질리게 한 체육 담당 안대준 선생님의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나는 정말 체육을 싫어했다. 싫어한 이유는 당연히 내가 체육을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중학교에 입학하고 항상 긴장하고 있던 내게 체육시간은 더욱 공포의 대상이었다. 바로 1학년 담당 체육 선생님이 무섭기로 악명 높았기 때문이다.
체육시간 첫날 우리는 모두가 팥색 체육복을 입고 운동장에 집합하였다. 신입생 친구들에게 배정된 체육복 컬러가 팥색이라니.. 나는 그때의 체육복 색깔이 그렇게나 싫었다. 누가 입어도 예쁘지 않았던 그 체육복에 반 친구들은 모두 왼쪽 가슴에 반, 번호, 이름을 박음질로 깔끔하게 박아 넣었다. 그리고 중학교에 와서 가장 낯설었던 것이 바로 교실에서 체육복을 갈아입어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몇몇은 혼자 수줍게 뒤돌아서서 갈아입고 더러는 친구가 옷으로 가려주면 그 안에서 갈아입는 방식으로 쉬는 시간 10분 동안 환복을 완료하고 운동장으로 집합해야만 했다. 그렇게 촌스러운 팥색 체육복을 입은 우리는 열중쉬어 자세로 구령대 앞에서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저 멀리서 안대준 선생님이 등장하였는데, 내 눈에는 마치 슬로우 모션을 걸어놓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선생님은 체육선생님답게 쫙 빠진 몸매에 착 달라붙은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상의는 가벼운 점퍼 차림에 호루라기를 목에 건 모습이었다. 중년의 남성이 저렇게 매끈한 다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 매우 경이롭기까지 했다. 머리는 바짝 자른 커트인데 뭔가 무스를 발라 뒤로 훌렁 넘겨 붙인 모양새였으며 입술을 꽉 다문 모습을 보니 바늘로 찔러도 피가 안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번뜩 들기도 하였다.
‘하.. 정말 무섭게 생겼다..’
선생님은 유신시절의 박정희 대통령과도 같은 표정으로 근엄하게 아무 말 없이 우리를 아래위로 훑어내었다. 체육복을 바르게 입었는지, 운동화를 신었는지, 번호와 이름을 바느질로 잘 새겨 넣었는지 등을 주욱 스캔하는 모습이 역시 듣던 대로였다.
“자~5반!! 반장 나와! 인사시키고 모두 4열 횡대로 정렬시켜! 그리고 4번 누구야!”
그런데 선생님의 목소리는 중저음이 아니고 톤이 높아서 약간 실망스럽기도 하였다.
“네??.. 전데요~~”
나는 소심하게 대답하고는 손을 살포시 들어 보였다.
“맨 앞줄이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고개 돌려 번호를 외치고 끝맺으면 4번인 네가 ‘가득 찼다’는 의미로 ‘만(滿)’을 외쳐라. 알겠나?”
“네~..”
“목소리가 왜 이렇게 작아? 크게 똑바로 대답 못해?”
“네!!!!”
이건 거의 칼각 잡힌 군부대였다. 가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했지만 군대를 간다면 분명 이렇게 줄을 서서 사단장이 인원수를 체크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앞줄 친구들이 줄 간격을 맞춘 후 1부터 14까지 번호를 외쳤다. 그리고 14를 외친 친구 줄의 4번째 끝에 선 내가 드디어 ‘만’을 말하면 끝이었다.
아뿔싸!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내 머릿속의 지우개가 ‘만’이라는 글자를 지워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분명 ‘ㅁ’이 들어가는 말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는 자신 있게 외쳤다.
“무?!!”
그러자 갑자기 아이들이 키득키득 웃어대기 시작했고, 체육선생님은 선글라스 안의 눈을 번뜩이더니
“뭐야? 뭐가 무라는 거야? 4번 나와!!”
‘난 죽었다..ㅠㅠ..’
나는 잔뜩 쫄아 붙어서 종종걸음으로 걸어나갔다.
“4번 김정민? 너 왜 무라고 했어? 무가 무슨 뜻이야?”
선생님은 소리를 버럭 지르셨다.
“없을 무인데요..‘이상 없다’, ‘없을 무’ 요.. 그러니까 제 말은 ‘오늘 빠진 친구가 없다’.. 는 뜻이에요..”
나는 무슨 깡이었는지 당황하지 않고 선생님께 소신껏 나의 생각을 피력하였다.
체육선생님은 갑자기 피식 웃으시더니 “먹는 무는 아니고?” 하며 익살스러운 말투로 내게 장난하는 식의 농담을 던지셨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고, 반 친구들이 대열을 흐트러뜨리면서 박장대소를 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야~~~ 만이라고 해야지 만~~”
결국 앞줄에 서있던 친구가 말을 해주어서야 내가 뭘 틀렸는지 알게 되었다.
체육 선생님은 내가 그렇게나 웃기셨는지 그날 이후로 나를 ‘똥순이’라는 애칭으로 부르셨다.
똥순이라는 뜻은 아직도 잘 모르지만 그냥 선생님 보시기에는 내가 딱 운동 못하는 똥순이처럼 보이셨던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실 나는 체육도 못하고 실수 연발인 몸치였는데 선생님은 그런 나를 아주 유용? 하게 사용하셨다. 예컨대 공을 드리블하거나 기구를 이용해야 하는 경우, 혹은 수영장에서 영법을 강의할 때마다 항상 마루타로 똥순이인 나를 이용하시곤 했다. 요즘 말로 나는 체육선생님의 애착인형이었다고나 할까?
체육시간이면 늘 “야!~무~~ 똥순이 어딨 어~~~ 나와!!”라고 하셨고, 나는 그 무서운 체육 선생님에게 나름 엉뚱한 캐릭터로 통하며 각종 실기의 예시로 활용되면서 ‘무섭지만 무섭지만은 않은’ 1학년 체육시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이후 졸업즈음 되어보니 왜 선배들이 그렇게나 안대준선생님을 좋아했었는지 나도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안대준 선생님~~1990년도 1학년 5반 똥순이입니다^^잘 지내시죠? 그 시절 선생님이 참 그립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