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아는 이름 말고 내가 아는 한 사람
“1학년 9반 부반장.. 황신혜 앞으로!”
고등학교 1학년 임명장 수여식을 하는 월요일 오전 조회날이었다. 구령대 위에서 교감선생님이 ‘황신혜’를 부르는 순간 운동장에는 선생님을 비롯하며 모두가 깜짝 놀라거나 수군거리며 ‘이름이 황신혜라고?’하며 앞으로 뛰어나가는 황신혜의 얼굴을 보려고 야단이 났었다.
수줍음이 많았던 신혜는 구령대에 올라 임명장을 받자마자 얼굴을 가리고는 후다닥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나의 가장 오랜 친구, 그녀의 이름은 전 국민이 다 아는 이름~ 바로 황신혜다. 그렇다. 8-90년대에 한창 주가를 올리던 탤런트 황신혜는 일명 ‘컴퓨터 미인’이라 불리며 세간에 화재가 되곤 했었다. 컴퓨터조차도 인정한 완벽한 얼굴을 한 황신혜. 그러다 보니 당시 황신혜라는 이름은 아예 미녀를 대표하는 고유명사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오늘 글의 주인공은 바로 연예인 황신혜가 아닌 '내 친구 황신혜'다.
국민학교 2학년, 나는 신혜와 처음 교회에서 만나게 되었다. 어느 여름날, 전도사님께서는 교회 앞마당에서 나에게 신혜를 소개해주셨다.
“너희 둘 다 2학년이고 같은 반이 되었으니까 주일날 만나면 친하게 지내렴~”
“안녕~ 내 이름은 황신혜야~”
“난 김정민..이야”
신혜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어른스럽게 세살터울 자신의 여동생 손을 붙잡고 간식을 나눠주기도 하며 살뜰히 보살피고 있었다.
당시 신혜는 내 눈에 너무 예쁘고 성숙한 모습의 친구였다. 같은 나이라고 하기에는 일단 신혜의 키가 월등히 컸다. 신혜는 긴 파마머리를 늘어뜨리고 반묶음을 하고 있었고, 짧은 반바지에 반스타킹을 신고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는데 가장 내 눈에 띄었던 건 바로 신혜의 가방이었다.
교회를 오는 대부분의 친구들은 신발주머니 같은 작은 가방에 성경책과 노트정도를 들고 다녔는데 신혜의 가방은 어른들이 메는 에나멜소재의 가죽백이었기 때문이다. 크기도 성경책이 들어갈 수 없는 아주 작은 크기였던 데다가 은장버튼이 햇살에 반사되어 무척이나 반짝이고 있었다.
‘저 가방은 마치 우리 막내이모가 출근할 때 매고 다니는 가방 같은데..? 쟤는 왜 어른가방을 들고 교회에 온 걸까?’
그렇게 서로 다른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되었고 학교는 달랐지만 꾸준히 교회에서 함께 어울리며 우정을 쌓아갔다.
시간이 흘러 6학년 교회 여름성경학교 때의 이야기다. 당시 여름성경학교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천로역정 코스였다.
교회선생님들은 1박 2일 코스로 우리를 훈련시키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셨고, 나와 신혜는 같은 조가 되어 기쁜 마음으로 천로역정에 참가하였다.
각 조는 한 팀이 되어 하나하나의 미션을 통과해야만 달란트를 획득할 수 있었다.
각 관문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사탄으로 분장을 하시고 기다리고 계셨고 우리가 열심히 말씀암송을 하거나 미션수행을 해야만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는 꽤나 흥미진진한 게임이었다.
우리 조는 무사히 마지막 관문까지 오는 데 성공하였다.
마지막 코스는 교회 본당 2층 구석이었고 입구에서 선생님은 '이 코스가 가장 어려운 코스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신중하게 잘 마무리하길 바란다'라고 기도도 해주셨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온몸을 붕대로 감은 미라 형상의 사람이 교회 의자에 길게 뉘어져 있었다. 평소 우리와 친한 교회선생님인걸 알면서도 우리는 모두 겁에 질렸다.
옆에 서계시는 선생님이 연기톤으로 말씀하셨다.
“이 환자는 내 아들입니다. 그런데 나병에 걸렸어요. 여러분 중에 누군가가 손을 올리고 기도해 준다면 내 아들이 나을 거예요~부탁이에요 기도해 주세요~”
이 모든 게 짜인 연극이란 걸 알면서도 우리 모두는 뒷걸음질 쳤다. 그만큼 실감 나는 분장과 선생님들의 연기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 나병환자가 손을 내밀며 내 옷자락을 붙잡았고 나는 거의 비명을 지르며 뿌리쳤다. 그때였다. 신혜가 그의 손을 잡고 조용히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 이 환자의 병을 고쳐주세요~그리고 더 이상 아프지 않게 이 사람을 제발 도와주세요... 흑흑..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신혜는 기도를 하며 울고 있었다. 신혜의 진심 어린 기도가 끝나고 그 방안에 있는 그 누구도 소리 내지 않았다. 신혜의 기도 후 나병환자 역할을 하시던 선생님은 똑바로 서시고 신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우리 조는 무사히 천로역정의 모든 코스를 통과했다. 후에 들어 안 얘기지만 그 코스에서 신혜 말고는 아무도 나병환자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린 마음에 공포스럽기도 했고 실제로 그의 몸에 손이 닿으면 병이 옮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이 날 이후 나는 동갑내기 친구였던 신혜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후 나는 신혜와 같은 학원도 다니고 독서실도 다니며 고등학교시절을 함께 했다. 하지만 신혜는 강렬한 이름 덕분에 가는 곳마다 유명세를 치르거나 때로는 원치 않는 곤욕을 겪기도 하였다.
“정민아~~~~~~~”
신혜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나를 만나면 반달눈이 되면서 어린 시절 내 이름을 부르던 앳된 목소리가 된다. 서로 너무 먼 곳에 사는지라 일 년에 한 번을 만나도 어제 만난 것처럼 우리의 수다는 계속된다.
“신혜야~우리는 한 번도 서로를 오해하거나 불편해한 적이 없다. 난 그게 참 신기해”
“그럼~~~~ 난 9살 때 널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 영혼의 단짝이라고 생각했는 걸~”
학창 시절 신혜는 늘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았는데 나는 단 한 번도 못된 마음으로 샘을 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신혜야~나 요즘 브런치에 글 쓴다?”
“어머 정말? 너무 멋지다~~ 나도 작가의 꿈을 꿨었는데 결국 네가 먼저 시작하는구나!”
“그래서 말인데 조만간 너에 대한 글을 몇 차례 쓰려고 해~너에 대한 글은 니 이름이 실명으로 공개되어야 글을 쓸 수 있을 건데.. 괜찮지?”
“아~~ 알았어!! 니 글 기대할게!”
오늘 이 글에서만큼은 세상사람들이 모두 아는 미인 황신혜가 아닌 내 맘속 오랜 벗이자 내가 사랑하는 친구 '황신혜'가 주인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