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번 버스

현정언니와의 추억

by 김상궁

현정언니는 큰아버지의 막내딸이다. 언니는 위의 형제자매들과 나이차이가 나다 보니 집에 혼자 있는 걸 무척 심심해했다. 그래서 언니가 찾은 대안은 바로 언니가 사는 발산동에서 388번 버스를 타고 독산동 우리 집까지 와서 우리 세 자매와 함께 노는 것이었다. 13살 6학년이었던 언니는 정말 놀아주는 데는 탁월했다. 당시 나는 언니가 진짜 내 친언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했었는데 언니와 내 이름에 같은 '정'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뿌듯해했었다.

언니는 우리 집에서 어느 정도 놀다가 저녁 즘에 388번을 타고 다시 발산동을 갈 때면 나에게 어디 어디 데리고 가준다고 슬슬 꼬셨고, 나는 금세 그 꼬임에 넘어갔다. 언니와 388번을 타는 건 내게 정말 재미있는 여행이었는데, 엄마아빠와 타는 버스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를테면 언니는 정류장마다 보이는 간판을 읽어주기도 하고 이제 몇 정거장이 남았다고 친절하게 알려주기도 하였다. 내 보기에도 언니가 제법 의젓했고 어른스러웠던 건 자리가 나면 냉큼 내게 자리를 내주며 앉으라고 했었던 거다. 그중에서도 제일 내 기억 속에 오래 남던 건 남부순환로를 타고 가다가 오류동 언저리에서 산 위에 박혀있는 광고판이었다.
"정민아~버스가 저 광고판 지나가면 그 뒤를 봐~뒤에 프로펠러가 돌아가고 있어!"
언니는 이 사실은 거의 자기만 알고 있을 거라며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처럼 의기양양해 보이기까지 했다.
"우와~~ 진짜다. 나도 봤어!!"
"거봐~~ 내가 있다고 했지?"
그렇게 우리는 저녁이 지나서야 발산동 큰집에 도착하였다. 독산동 우리 집은 셋방에 보잘것없는 집이었지만 언니 집은 당시 내 눈에 무척이나 으리으리했다. 사자머리를 한 대문 손잡이도 웅장해 보였는데, 벨을 누르면 안에서 큰 소리를 내며 대문이 덜컹하고 열리는 장면은 당시 나를 압도했다. 마당은 잘 깔린 잔디가 있었고 집을 지키는 개도 줄에 묶여 컹컹 짖어대며 나를 환영했다.
중앙 계단을 올라 언니집 현관을 들어서면 신발장, 벽, 천장, 마루까지 모두 같은 색의 나무로 장식이 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런 고풍스러운 큰집에 내가 있다는 것조차 뿌듯했다. 그리고 언니 집 거실에는 기역자로 놓여진 소파가 있었고 그 맞은편엔 내가 너무도 갖고 싶던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사실 내가 언니를 따라나선 것도 바로 저 피아노를 한번 쳐보고 싶어서였다. 피아노 뚜껑을 열자 건반에서도 나무 냄새가 가득했는데 마치 언니 집은 전체가 다 나무로 장식된 거대한 나무성과도 같아 보였다.
그렇게 언니는 방학 동안 탐구생활, 일기, 공부, 피아노레슨까지 해가며 일명 선생님 놀이에 심취했다. 처음엔 나도 재미있었지만 언니가 너무 열과 성을 다해 선생님이 되려고 하다 보니 나를 혼도 내고 제대로 못한다고 다그치기까지 하였다.
‘치. 다시는 오나 봐라. 언니 못된 거 엄마한테 다 일러바칠 거야!’
이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혼자 토라져 있다가 잠이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밥을 차려주고 재밌는 곳을 데려가주어 나는 금세 잊어먹고 다시 언니와의 시간에 푹 빠져 지냈다. 정말 재미있었던 건 언니의 마술쇼시간이었는데 나에게 신문지를 벅벅 찢어서 그릇 안에 넣게 한 뒤 언니는 그 안에 마술사처럼 멋들어지게 주전자 물을 부었다. 그리고는 보자기로 그 그릇을 덮고 내 콧기름을 세 번 만져 보자기에 문지르며
"수리수리 마수리~~~~ 얍"

그런데 다시 열어보니 여전히 신문지였다.
"이건 너가 의심이 많아서 그래. 그러니까 진심으로 믿으면서 다시 외쳐봐."
"수리수리 마수리~마수리~~~ 얍! 얍!"

큰 소리로 주문을 외치고 난후 언니가 보자기를 걷어내자 그릇 안에는 하얗게 삶아진 국수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우와~~~ 신문지가 국수가 되다니!! 너무 신기하다~~~"
사실 내가 높게 쳐든 그릇을 보는 사이 언니는 왼쪽 손에 미리 삶아둔 국수 그릇과 바꿔치기를 한 것이다. 물론 그때 나는 7살 1학년의 어리숙한 아이였기에 깜빡 속아 넘어갔고 그날은 언니가 마술로 만든 국수 한 그릇을 맛있게 다 먹어치웠다.
이처럼 언니는 정말 정성을 다해 나의 1학년 시절의 추억에 기여한 바가 크다. 그리고 그다음 방학였을까? 언니는 또 388번을 타고 우리 집에 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나는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언니의 타이트한 선생님 놀이가 이제 더 이상 재미가 없어진 것도 있었고 동네 친구들과 노는데 재미가 들려 그 멀리까지는 가고 싶지 않았던 거 같다.
"피아노도 치고 스케이트장고 가고 놀이동산도 가자~"
".. 안.. 갈래 "
언니는 힘없이 돌아서며 독산동 집 언덕을 천천히 올라 걸어가고 있었는데 나는 아직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마치 전리품을 하나도 못 건져 어깨가 축 쳐진 병사마냥 그렇게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가던 언니모습을 바라보던 나.
며칠 전 운전하다가 내 앞에 388번 버스가 서며 두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어머나. 아직도 이 버스가 있네~세상에나!!’
나는 부리나케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388번 기억나지? 이 버스가 지금도 다니네~~ 갑자기 언니가 저 버스 타고 나 데리고 발산동 가던 길이 생각나서 전화했어~~"
전화 너머로 언니는 쓸쓸히 웃으며 말했다.
"너도 이제 늙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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