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시선 속에서
몽롱하게 뿌연 빛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 밝지 않은데도 눈을 뜰 수가 없다. 손으로 이마를 짚고 손가락 사이로 살짝 보면 그들만의 세상이 눈에 들어온다. 시간과 장소가 분간이 안가는 안개 속에서 마주보는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만 간신히 비추는 작은 불빛을 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김초엽 작가의 이야기에는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가 있다. 이번 장편에서도 그 분위기가 극대화 된다. 그의 소설에는 느슨한듯 진행되는 전개에도 눈을 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마치 세상이 멸망으로 치닫고 있어도 중요한건 서로 밖에 없다는 듯이 응시하는 시선처럼. 막상 레이첼과 지수가 시선을 길게 주고받은 것은 얼마 되지 않는데도 서로를 향한 눈빛이 느껴진다.
그리고 다른 인물들도 저마다의 갈등과 애틋함을 가진다. 생존하고자 강한 결속력을 가지는 공동체가 있지만 그들은 너무 위태롭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만 가지고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들리는 관계 속에서 식물의 존재가 돋보인다. 점점 갈등이 치닫는 와중에도 소리 없이 주변환경에 적응하며 살아남는 식물의 생명력이 눈에 들어온다. 그 덕에 세기말의 폐허에서도 너무 잔인해지지 않고 공존을 희망하게 된다.
소설이 좀 더 강렬했더라면, 인물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려준다면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굳이 다 보여주지 않아도 봄비 처럼 서서히 젖어들며 윤곽이 드러나는 모습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