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사의 것을 네 것이라 하지 마라

그들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

by 시인 손락천

'근본에서부터 패륜의 피가 흐른 운동을 할 것인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계몽운동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민족을 살릴 유일한 길인 것처럼 회자되었고, 실제로도 이것은 개념찬 지식인이냐 아니냐를 가름하는 척도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았던 당대 지식인들의 최대, 최고의 화두로서의 계몽주의는 과연 정당한 뿌리를 갖고 있었던 것일까?


필자는 물음을 던지면서도, 이 물음이 과연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회의적 반발에 의미 있는 답을 해 줄 수가 있는 것인지를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필자의 생각으로는 최소한 기독인들에게 있어서는 이 물음이 이미 오래전에 물어졌어야 할 것이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계몽주의가 이 땅의 지식인들에게 화두가 되었을 당시가 바로 이 땅에 기독교가 뿌리를 내려 절정의 열매를 맺었던 때와 일치하고, 아울러 그 지식인들의 선두에 서서 계몽운동에 앞장섰던 장본인들 역시 바로 기독교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계몽주의는 이 땅에 꽃 피워진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성을 맺어 왔고, 또한 그 화두에 몸소 투신한 선대 기독지식인들의 사유와 사상이 이 땅에 이룩된 기독교 문화와 정서에 한 축이 되었기에, 지금 이 땅의 기독교 사상이 과연 옳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나아가 그 방향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지의 문제는, 바로 우리가 당연시하며 자랑스러워 마지않는 출발점을 면밀히 되짚어 봄에서야 비로소 그에 대한 제대로 된 파악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계몽주의는 17세기 중엽 무렵에 태동하였다. 그렇다면, 그 태동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가톨릭 문화와 사상이었다. 즉, 계몽주의를 잉태한 모체는 바로 기독교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기독교로 인하여 계몽주의라는 사조가 형성되었지만, 그것은 오염되고 비뚤어진 기독교 문화와 사상에 반발하여 만들어진 사조였다는 점이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적절한 비유가 떠오르지는 않지만, 마치 계몽주의는 비뚤어진 부모 밑에서 태어나 그 부모를 공격한 패륜아와 같은 것이다.


어쩌면 이런 극단적인 표현이 지나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러한 평가에 상당한 호소력이 있다고 본다.


어째서 그러한가? 계몽주의라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반발이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기독교 그 자체가 아니라 기독교가 형성한 부가적 문화양상 또는 규범에 대한 반발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계몽주의는 가톨릭의 연옥, 악마, 마녀에 대한 개념 및 그로 인해 빚어진 마녀재판에 대하여 반발한 것에서 시작되었고, 그러한 개념이나 마녀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그야말로 가톨릭이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허구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계몽주의는 이미 오염되어 복음을 상실하여 버린 기독교의 껍데기에서 비롯되었기에 필자는 계몽주의를 그릇된 부모 슬하의 아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계몽주의가 그릇된 패륜아와 같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일까?


17세기 중반은 어렵게 버텨가던 중세의 기독교 문화가 집중포화를 받기 시작할 무렵이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중세의 가톨릭은 정치․경제․사회․문화 영역에서 무소불위의 장악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대의 유대교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기보다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외식과 의식에 함몰되었던 것처럼 이 당시의 가톨릭 문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유전과 관계없는 외식과 의식에 함몰되어 있었던 상황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마녀사냥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도대체 악한 정령을 생성시키며, 악마와 교류한다는 마녀가 어디에 근거한 발상이었는지는 몰라도, 당시의 가톨릭과 그 신자들은 그러한 개념을 아무런 주저 없이 타당한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마녀재판이 심심찮게 일어났는데, 계몽주의의 태동은 바로 이러한 마녀재판의 당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토마지우스라는 독일의 법학자이자 철학자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독일 라이프치히 법학교수였던 그는 마녀재판의 감정을 맡게 되었다. 당시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가톨릭 문화권이 생성한 마녀에 대한 관념을 아무런 의심 없이 맹종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와 같은 지식인에게조차 그런 말도 안 되는 사상을 주입하였는지는 몰라도 여하튼 그 당시의 그는 그러했다.


그는 확신에 찬 신념으로 재판에 회부된 여인이 마녀임이 분명하며 그래서 엄단을 하여야 한다는 감정을 내어 놓았다. 그러나 그의 감정은 결국 그 여인이 어떤 근거로 마녀인 것인지에 대한 입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신념이 무너지는 일이었고, 또한 학자로서의 신뢰성에도 큰 타격을 입히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는 곰곰이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따져 묻게 되었고, 결국 그가 그토록 믿어 왔던 마녀에 대한 관념이 사실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이었다는 결론을 내어 놓게 되었다.


이후로 그는 다시는 마녀재판이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라며,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 모든 것들에 대하여 다시 합리적으로 사유하여 불합리한 것들을 쳐낼 것을 권고하였고, 그러한 그의 주장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커다란 호응을 얻으면서 결국 그가 원하던 일을 사실상 이루어내게 된다.


이와 같이 그의 사유방식은 분명히 의미 있는 것이었고, 이는 중세시대의 암운을 걷어 낼만한 혁신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유방식은 그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스스로 생각하기는 고정된 사유방식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중세시대의 막을 내릴 수 있는 혁신이었다.


그래서 그 사유방식은 점차 이론화되어 간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유방식이 존속하려면 바로 그와 같은 사유방식이 과연 옳은 것이냐에 대한 근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 생각한 것이 어떻게 기존의 사유방식을 깨뜨릴만한 가치를 가지느냐의 문제, 즉 스스로 생각하여 타당하다고 내린 결론이 그동안 의심 없이 받아들여져 왔던 관념과 불일치할 때, 도대체 스스로 생각하여 타당한 것이라고 내린 결론이 정말로 옳은 것인지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결론적으로 그 사유방식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려고 한 노력들이 바로 계몽주의다. 즉, 계몽주의는 인간이 스스로 판단한 것이 신학적 판단보다 더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이론인 셈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이론이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그것은 신의 사유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의 사유를 상정할 때만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위와 같은 이론이 가능하려면 인간이 원래부터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본유관념(이성)을 가졌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인간의 지각과 관찰능력이 제대로만 발휘된다면 사물 자체가 가진 본유 성질에 의하여 결국 인간이 진리를 발견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어야 한다.


첫 번째 견해와 관련된 것이 바로 관념론이고, 두 번째 견해와 관련된 것이 바로 경험론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들은 결국 수정에 수정을 거쳐 칸트와 헤겔 등에 의해서 집대성된다.




이쯤에서 앞서 제시하였던 결론으로 돌아가 보자. 필자는 서두에서 계몽주의가 그릇된 패륜아라고 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중세의 잘못된 신관은 반드시 고쳐져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릇된 신관은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돌아가 그 복음의 정수로서 해체되어야 했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복음과 상관없는 방법으로 중세의 신관을 해체하려고 하였고, 그것은 모순되게도 기독교 기본 정신 자체를 배척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중세의 신관 자체를 해체의 대상으로 본 것은 여타의 종교개혁이나 계몽주의가 다를 것이 없지만, 계몽주의는 그 해체의 방법을 복음의 재검토에 두지 아니하고 복음과 상관없는 인간의 완전한 이성 또는 물질의 완전한 성질에 두어 버렸고, 그 결과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복음을 불합리한 것으로 밀어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지도자들은 이러한 계몽주의의 태생과 모순에 대한 순화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은 채, 오히려 전혀 복음적이지 않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 함몰하여 이를 기초로 기독교의 세력 확장에 힘을 써는 우를 범한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신비로워야 할 신성에의 향수를 걷어낸 채, 과학 참여와 사회 참여로 기독교 세력을 확장하고, 그것이 곧 복음 전파이자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고 믿는 자, 그러한 자들의 행위는 그 자체가 바로 종교 농단이자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는 국정 농단의 줄기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지도자가 사상적 패륜을 비판 없이 받아들인 자인 이상, 그래서 여전히 계몽주의의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자인 이상, 그것이 전통적인 기독교를 표방한 것이든, 유사 종교를 표방한 것이든, 그것 자체가 바로 폐단의 시작이자 농단의 씨앗이자 꽃이 되는 것이고, 그런 이유에서 필자는 그들에게 스스로 심각하게 고민한 후 적어도 그러한 상태라고 판단된다면 그만 현실정치에서 손을 떼시라고 권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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