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 대한 세 번째 이야기 - 관념론과 경험론, 계몽주의의 틀에 대한
계몽주의의 요체는 인간이 진리를 온전하게 사유할 수 있는 존재라는 데에 있다. 즉, 그동안은 그저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불확실하고 맹목적인 관념으로 인하여 인간 스스로 진리에 다다를 수 있었던 기회가 묵살되어 왔고, 또한 그 때문에 부당하고 부조리한 사회와 문화를 형성하여 왔지만, 이제는 인간이 스스로 사유하여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인간상과 사회상을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계봉주의가 제시한 희망이었다.
이에 대하여는 칸트까지의 근대철학에서 자세하게 설명되어 왔는데, 그 축의 근본은 관념론과 경험론에 있었다.
관념론이 그 이론의 기초로 삼은 것은 인간의 완전한 사유 능력, 즉 이성이다. 데카르트의 생각은 인간이 사유한 대상과 실제의 대상이 일치하면 그렇게 획득된 지식 자체가 곧 진리가 된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이성이었다.
즉, 사람은 대상을 그 본질 그대로 사유할 수 있는 본유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곧 이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상은 그것에 대한 사유와 그것 자체인 연장으로 존재하게 되는데, 비록 그 존재양식인 연장은 각 개체에 따라 본질적이지 않는 상이함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에 대한 사유는 언제나 본질적이고 완전한 존재양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데카르트는 특히 기하학이나 수학적으로 밝혀질 수 있는 관념, 즉 사유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원, 삼각형 등이야말로 대상의 본질을 가장 그대로 드러낸 지식, 다시 말해 진리라고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대상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는 사유가 언제나 가능한 것이었을까? 데카르트는 그러한 사유에 방해되는 것이 있다고 한다.
바로 이성과 따로 노는 인간의 감성 또는 정념이 그 방해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의 입장은 인간이 대상의 본질을 사유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진리를 발견하여 합리적인 세계를 구축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성 또는 정념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주요하게 언급된 것이 바로 도덕론이었다.
따라서 관념론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는 계몽주의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이성에 터 잡은 진리에로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이성의 작업을 방해하지 않게 할 환경을 조성하는 것, 즉 현실적으로 도덕론을 구현시키는 것이었다.
인식론과 도덕론이 병행된 관념론의 형식적 특징은 비록 다소간의 차이가 있지만, 모든 관념론에서 비슷하게 나타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데카르트 이후의 관념론에 영향을 미친 경험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험론은 인간이 대상을 지각하여 형성한 지식, 즉 직접 관찰하고 인식한 경험의 산물이야말로 진리에 해당하는 것이고, 그러한 것에 터 잡지 아니하고 도대체 경험할 수 없는 신이니 신앙이니 하는 비과학적인 것에 터 잡아 형성한 관념은 그 자체가 진리도 아닐뿐더러, 오히려 진리에 이르는 사유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인간이 관찰과 인식을 통하여 대상의 본질을 알게 되는 것은, 원래부터 인간에게 대상의 본질을 사유할만한 완전한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가 가진 본유한 성질 때문에 부단한 관찰이나 인식을 통하여 그 본유 성질이 드러난 것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애초에 경험론이라는 것 자체가 비과학적이고 비경험적인 것을 배척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는 사물 자체가 가지고 있다는 본유 성질 또한 경험된 것이 아닌 선험적인 존재라는 이유로 배척되기에 이르렀고, 결국 본유관념이나 본유 성질 모두가 배척된 상황에서 인간이 알 수 있는 것들 중에 자명하다고 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불가지론으로 치닫게 된다.
즉, 사유로 인한 진리에로의 가능성을 한참 이야기하였는데, 결국 그 이야기를 풀어 나가다 보니, 사유로서 인식한 대상이 실제의 대상과 일치하는지를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느냐의 문제에 봉착함으로써, 스스로의 존립근거가 와르르 무너지게 될 형편에 처해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칸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대상 그 자체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도태시켜 버린다. 즉, 대상 그 자체가 무엇인지를 인식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고, 따라서 진리가 무엇이냐의 문제는 왜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사물을 약속이나 한 것처럼 똑같이 인식하느냐 하는 인식의 패턴에 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모두가 사과라고 인식한다면 그것이 사과이고, 그 사과의 모양이 둥글고 맛은 새콤달콤하다고 인식한다면 그것이 사과의 본질인 것일 뿐, 실제로 사과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사과의 모양이 어떤지 그 모양과 맛이 어떤지는 중요한 것도 아니고 진리를 파악하는데 장애가 될 것도 없다는 것이다(가령,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다른 인식 주체가 있는데, 그 주체들은 공히 사과를 똥으로 인식하였고, 아울러 그 모양이 맛이 똥과 같다고 인식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인식한 사과일 뿐, 결코 그러한 인식이 인간이 사과에 대하여 형성한 관념이나 효용에 미칠 영향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에게서 진리라는 것은 바로 사과를 사과로 인식할 수 있는 판단 형식 그 자체였고, 환언하게 되면 그 판단 형식으로 판단한 사물에 대한 지식이야말로 진리라는 것이었다.
칸트는 이러한 판단 형식으로 대상을 사유하는 능력을 순수 이성이라고 했는데, 그의 논리에 따르면 이러한 순수 이성이 작용하여 비로소 사람은 올바른 지식에 이를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칸트는 사유한 대상과 실제의 대상이 일치하느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앞서 살펴본 경험론의 시행착오를 참조하여 비켜날 수가 있었지만, 칸트에게도 비켜갈 수 없는 난점이 있었다. 데카르트가 본유관념에 대비하여 설명한 감성이나 정념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는데, 이는 칸트가 이야기한 순수 이성과도 결코 화합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래서 칸트는 순수 이성과 전혀 상관이 없는 실천이성을 언급한다. 즉, 실천 이성은 사유와는 전혀 상관없는 하나의 규범체계로서, 칸트는 그러한 규범체계로 하여금 순수 이성이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 방해물이 되는 육신의 소욕을 절제시키게 한 것이다.
즉, 이것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 외부에 있는 환경적 인자로서, 인간 스스로 따라가야 할 보편적 입법 원리를 천명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에 부합하여 행동할 것을 강제함으로써 순수 이성의 활동을 보장해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앞서 살펴본 여러 점들에 비추어 정리하면, 계몽주의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이성에 터 잡은 진리에로의 가능성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이성의 작업을 방해하지 않게 할 도덕적 규율 가능성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