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에 대한 집착 2

그들에 대한 네 번째 이야기 - 기로에서 양화를 구축하다

by 시인 손락천

잘못된 선택을 고수하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우상숭배다




진리를 사유할 수 있는 주체, 그러한 주체가 사유할 수 있는 진리는 계몽주의의 모토였다. 그러나 그 모토는 근대를 넘어오면서 산산이 깨어지고 만다.


이는 진리를 사유할 수 있는 주체가 불가능하다는 공격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공격은 주체 자체가 자명한 것이 아니고, 그래서 그러한 주체가 사유하는 사유 또한 자명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 공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자세하게 살펴볼 수는 없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그 대략의 내용에 대해서만 살펴본다.




근대적 주체가 과연 자명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냐의 문제는 의도적으로 공격당한 경우도 있고, 우연찮은 사건으로 인하여 뜻하지 않게 공격당한 경우도 있다.


첫째, 뜻하지 않게 공격당한 경우의 대표적인 예는 프로이트에서 찾을 수 있다.


정신과 의사였던 그는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무의식을 연구하다 보니 사실은 그것이 거대하게 조직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암중으로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발견하게 되었다. 즉, 겉으로 드러나 있는 의식적(이성적) 활동은 실재한 무의식이 인류사회에서 배척되지 않을 수준 정도로만 변형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따진다면 결국 의식적(이성적) 주체나 그 주체의 활동이라는 것은 자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힘에 의하여 사유하고 활동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어서, 자명한 사유의 주체라든지, 그러한 주체의 사유가 자명한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꿈과 같은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둘째, 의도적으로 공격당한 경우라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사유의 주체라는 것이 타자에 의하여 형성되었다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깊이 있게 관찰하여 보면 자명하다고 믿어 왔던 것이 사실은 습관적이거나 관념적으로 맹신되어 왔던 이미지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는 부류이다.


전자의 견해는 다시 여러 가지의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주체든 대상이든 간에 그것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역사적으로 부여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일 뿐, 고정되거나 자명한 그 무엇이 아니다”라는 마르크스의 견해, “주체든 대상이든 간에 그것은 그들에게 그러한 의미를 가지도록 한 권력의지의 산물일 뿐, 그것 자체가 고정되거나 자명한 의미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니체의 견해, “구조화된 언어라는 타자가 결국은 주체나 사유를 형성한다”는 언어 구조학의 견해, “구조화된 무의식이라는 타자가 결국은 주체나 사유를 형성한다”는 라캉이나 푸코의 견해 등, 타자의 담론을 담고 있는 부류의 견해이다.


후자의 견해는 후설과 하이데거와 같은 현상 학파의 견해 등인데, 이는 “예를 들어 어떤 것이 원이라고 할 때, 현실에 드러난 그 어떤 원도 그것을 자세히 관찰하면 무수한 굴곡과 구멍이 발견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이, 관념적이거나 습관적으로 자명하다고 한 사유는 그야말로 습관적 사유일 뿐, 정작 그것이 그 현상 자체를 그대로 인식한 것이라거나 그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고, 다만 그것의 실질은 그것에서 나타난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부류의 견해이다.




위와 같은 여러 견해의 공격은 아주 실효성이 있는 것이어서, 딱히 반박할만한 틈을 주지도 않은 채 주체와 사유의 불확실성을 도드라지게 해버렸고, 이제는 주체를 포함한 현실세계가 타자의 주도하에 있는 그 무엇으로 이해되거나, 진리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보다는 우리의 현실적 요구가 무엇이며 그것이 왜 쟁취 또는 충족되어야 하느냐를 따져 보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것처럼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계몽주의의 실패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사유의 주체가 불확실해져 버렸고, 그러한 이유로 그 사유가 바람직하다고 형성한 것(진리 개념, 과학 개념, 사회․문화․정치의 지도원리 등)들 또한 불확실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눈여겨봐야 할 문제가 있다. 바로 계몽주의의 실패가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그 결과가 어떤 양상으로 나타났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를 질문 형식으로 물으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계몽주의의 실패는 무엇에 연유하였던 것인가?

그것은 ‘타자(신)’를 배척하고 스스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주체’를 상정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주체’ 이전에 이미 그 주체를 형성토록 한 ‘타자(언어? 무의식?)’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회귀하고 말았지 않는가?

그러나 공교로운 것은 무엇인가?

신이란 타자로부터 탈출을 감행하였더니, 결과는 그동안 문화의 산물이거나 인간의 속성 중의 하나로 알고 있었던 것들에게 종속되어 버리고 만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결국 이 말은 무엇인가?

신의 자리에 창조물 중의 하나가 들어선 것이 아닌가?

이것을 일러 무엇이라 하는가?

우리는 이와 같이 신의 자리에 들어선 창조물을 우상이라 하지 않는가?



실패한 꿈에 대한 집착


계몽주의는 실패한 꿈이다.


그 실패는 신으로부터 탈출하게 됨으로써 부담하게 된 주체와 사유의 불확실성에 대하여 이를 해명할 방법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실패의 결과는 창조물(그동안 문화의 산물이거나 인간의 속성 중의 하나로 알고 있었던 것들)에게 신의 자리(소위 말하는 ‘타자’의 자리)를 내어주는 참람함이었다.


종교지도자들은 주체와 사유에 대한 담론을 대함에 있어, 인간의 가능성을 무한하게 열어 두고서도 얼마든지 신에 대한 근본적인 갈망과 갈증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었다. 그것은 사유의 풍요로움에 기대어 발견한 여러 가치를 두고서, 그것과 관련하여 충분하게 스스로 인정받았음에 대한 영광을 신에게 돌릴 수 있었던 까닭이었고, 이는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남겨두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리라는 지혜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철학과 자연과학, 그리고 사회과학의 도전에 함몰하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신비로워야 할 신성에의 향수를 걷어낸 채(사람에게, 또는 사람 사이에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영역이 있고, 그 실재를 도무지 부인할 수가 없음에도 이를 무작정 도외시 한 것이다), 오히려 도전받은 그것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현실에 부합하지 않은 억지스러운 기독 철학, 과학, 사회학, 목회, 사회참여, 정치참여 등으로 기독교의 세력 확장에 힘을 써는 우를 범한 것이다.


그러고 더 나아가 그들은 다시 현대철학의 도전을 받자, 잘못된 선택을 반성함 없이 더더욱 나아가 사유의 풍성함을 거부한 채 계몽주의의 미몽에 근거한 착오를 더더욱 공고히 함으로써 기독교에게 이른바 개독교라는 오명을 씌우는 큰 잘못을 저질러 버린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계몽주의에 대한 집착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