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몽 - 잘못된 소통

그들에 대한 다섯 번째 이야기 - 소통을 잃다

by 시인 손락천

프로테스탄트, 적과의 동침



프로테스탄트, 각성과 야합


필자는 지난번에 계몽주의 이야기를 하면서 복음을 상실하여 버린 기독교의 껍데기에 반발하였던 두 가지 흐름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즉, 중세의 잘못된 신관은 반드시 고쳐져야 할 것이었는데, 그중에서 하나의 흐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돌아가 그 복음의 정수로서 중세의 신관을 해체하려고 하였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복음과 상관없는 방법으로 중세의 신관을 해체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그것이 바로 계몽주의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두 측면의 흐름은 이후로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특히 위에서 언급한 첫 번째 흐름은 다양한 종교개혁을 이루어 내어 주목할만한 성과를 이루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만다. 무슨 일이냐 하면 서로 상이하여 결코 섞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두 흐름이 서서히 하나로 뭉쳐지게 된 것이다.


즉,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프로테스탄트는 계몽주의와 손을 잡고 만다. 다시 말해, 복음을 상실하여 버린 기독교의 껍데기에 반발하여 불꽃처럼 타올랐으나, 결국은 신을 떠난 사유의 한계로 인하여 몰락하고 말았던 계몽주의를 끌어안게 된 것이다.



평가


이것은 마치 중세 교회가 자신의 성세를 누리기 위하여 복음과는 하등의 관련이 없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교회 안으로 들여와 그것으로 복음을 제단함으로써, 결국은 스스로 복음을 상실하여 버린 것과 비견될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아브라함이 사라를 통하여 이삭을 주기로 하였던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여 하갈을 취함으로써 결국 이스마엘을 얻게 된 것과도 비견할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프로테스탄트는 이와 같은 일(계몽주의를 끌어안게 된 것)을 감행한 것이었을까?

프로테스탄트의 지도자들이 바보였기 때문에 중세의 실수와 아브라함의 실수를 되풀이한 것일까?


아니면, 비록 계몽주의를 끌어안더라도 결코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당하지는 않을 만큼 자신감이 충만하였던 것일까?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의 지도자들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계몽주의를 끌어안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역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중세의 실수와 아브라함의 실수에 비견될만한 실수였고, 이로써 프로테스탄트는 중세의 교회가 형성하였던 비복음적 외피를 둘러싸게 된 것이고, 이는 반드시 정화되어야 할 심각한 오염이 된 것이다.



물음을 던지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프로테스탄트가 계몽주의를 끌어안았던 것일까?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와 계몽주의의 결합은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


이 물음이야말로, 필자가 이 글을 쓰면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부분이고,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계몽주의는 이성의 힘으로 교회의 권위와 전통 아래 방치되어 버린 무지와 억압의 상태를 극복하려 한 시도였고, 그래서 그것은 매우 짙은 호소력을 가졌었다.


이러한 계몽사상은 여러 갈래로 나누어질 수 있겠지만, 역시 그 기초는 인간 이성과 자연이었고, 이러한 이성과 자연에 대한 대담한 긍정은 당시 급속히 발전했던 근대 과학기술을 등에 업고 그것이 곧 인간의 행복을 궁극적으로 실현해 줄 것이라는 장밋빛 희망을 건네주었다.


그래서, 경험론자들이나 합리론자들은 전통과 권위를 믿기보다는 이성을 신뢰하여 그 이성을 통한 사유와 관찰로서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여겼고, 그러한 인간의 지식에는 한계가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즉, 그들은 사고하는 주체를 정점으로 하여 사유나 경험을 통하여 채득 한 올바르고 훌륭한 지식이 인간을 무한히 진보시킬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자연과학을 통하여 터득한 자연의 이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을 다스리게 하며 이러한 지식은 결국 부당한 사회구조와 자연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논리는 그 자체가 충격적이면서도 치명적인 도전이었다. 왜냐하면 이전까지는 확실하고 자명하다고 할만한 것들의 근거는 오직 신의 계시에 있었지만, 이제는 그 근거를 사고하는 주체에 두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도전은 하나씩 밝혀지는 자연 원리와 과학원리들에 의하여 도저히 배척해버릴 수만은 없는 현실적인 계륵일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성의 우위를 인정하여 합리주의적 철학의 기초에서 다시 신학의 틀을 잡든가, 그렇지 않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 자체만으로는 영원한 실재들에 대한 지식을 창출할 수 없다는 근거를 제시해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울추는 서서히 기울었다. 왜냐하면 전에는 알 수 없었던 자연현상과 사회 현상의 원리가 하나씩 밝혀지고 진단됨에 따라 성경적 세계관의 지배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그 지배력의 강력한 수단이었던 자연 또한 더 이상 두렵거나 신비로운 대상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기독교는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을 내용으로 하는 위로부터의 종교에서, 서서히 신의 존재와 도덕률의 당위성을 이성에 의하여 입증할 수 있다고 믿는 아래로부터의 종교로 변화되었다.


말인즉, 계시는 근거가 불확실한 반면에 이성은 확실한 것이어서, 믿되 합리성이 결여된 것은 이성적 검증을 통하여 걸러내자는 것, 다시 말해 신앙의 주체가 계시에서 개인의 이성으로 옮겨진 것이다.


이것은 초월자인 하나님이 인간에게 들어와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이치와 자연의 이치를 이성 안에서 발견하고, 그로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인데, 이를 일러 중세의 초월성에 대항한 내재성이라 한다.


이후 계몽주의는 그 자체가 가진 논리적 한계(주체의 불확실성, 사물과 인식된 사물의 불일치성, 경험의 불확실성 등)로 인하여 주춤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오히려 신학을 더욱 궁지로 몰고 가게 된다.


왜냐하면, 기존의 경험론이나 합리론이 가진 약점이 보완되는 과정에서 기독교는 그야말로 아주 특별한 영역 안에서만 기능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이다(칸트는 종교를 이성의 영역과 완전히 구별하여, 종교를 이성이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 육신의 소욕을 억제하는 도구, 다시 말해 실천이성 영역에서의 유용하게 사용될 도구로 설명하는데, 이는 소위 말하는 행위의 준칙으로 삼을 보편적 입법 원리 정도였고, 이는 어떤 것으로든 대체가 가능하였다).


이러한 타협과 제한 속에서 기독교는 스스로 복음을 훼손하였다. 즉, 복음의 인간에 대한 전방위적 영향력을 인위적으로 제한한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기독교는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초월성의 중요성을 조금씩 회복하고 있는 측면이 있지만, 아직 옛 잔재가 모두 떨쳐진 것은 아니었다. 즉, 믿음이 인간을 이성이 도달할 수 없는 곳으로 안내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러한 믿음에는 인간의 신앙적 의지가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어느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사실이 가만히 있는 나를 덮쳐 나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변화시킨다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나의 의지, 나의 믿음, 나의 신앙고백, 나의 행위가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나를 신앙인으로 변화시킨다는 논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미몽이라는 망령 - 소통의 본질과 방법을 망각하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정리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에 전파된 기독교는 계몽주의의 폐해로부터 안전하였을까?


필자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나아가,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계몽주의 미몽 아래 있을 뿐 아니라, 그 계몽주의적 미몽에 더더욱 충실한 모습을 보여 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정은 오늘날의 교회를 상고함에 있어, “전도가 무엇인가?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교회란 무엇인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교회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에 충실하여 보면, 알 수가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전도라는 것은 미련한 것이다. 최소한 인간사회에서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방식의 그 무엇이다. 이것은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합리성이 결여된 행위다.


복음이라는 것은 합리적인 설명이나, 설득이나, 강요나, 교육이나, 사상적 구걸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혹시 그렇게 해서 타인으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였다면, 이는 거의 모두가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전도라는 것은 옥토든, 돌밭이든, 가시덤불이든 간에 그저 하릴없이 복음을 흩뿌리는 것일 뿐이다.


즉, 그 복음이라는 씨앗이 싹을 틔웠는지, 무성하게 자랐는지, 열매를 맺었는지와 상관없이, 무작정 그 복음을 흘리고 다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 속에 있는 복음이 나를 가만히 있게 놔두지 않아서 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잘 설명된 전도, 내가 저 사람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목적 아래 이루어진 전도, 믿음의 대가를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마치 장사하듯 믿음을 흥정하는 전도, 장래에 이루어질 저주를 언급하여 겁박하듯이 하는 전도, 마치 무슨 사랑과 행복에 충만하여 그것을 꼭 너에게 알려 주었으면 좋겠다는 듯이 자랑하는 전도 등은 이미 진정성을 잃은 것이다.


왜냐하면 전도는 그리스도 예수가 내 죄를 인하여 나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인데, 이것은 논리적인 설명으로 납득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경로가 허락되어야만 납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전도는 어떠한가?


마치 무슨 투자설명회를 하듯이 전도를 한다. 믿게 되면 받게 될 갖가지 혜택을 빙자하거나, 곧 사그라들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한 보험을 빙자하여 불특정 다수인을 끌어들이는 형식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도방식은 전도자들에게 성과에 대한 부담을 지운다. 목표를 지정하여 그것을 달성하도록 독려하거나, 마치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낙오될 듯한 압박감을 주거나, 마치 전도자가 무지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환상을 심어주거나, 마치 그러한 전도의 성과가 후일의 복락을 결정시키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전도는 진정성을 잃은 것이다. 이것은 전도가 아니라 사기에 가까운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사기는 개인의 능력과 성취욕, 그리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완성적 자아를 구현시킬 수 있다는 잘못된 동기에 기인한 것이다.


왜냐하면, 전도는 미련한 것이고, 전도는 피전 도자의 변화를 책임질 수 없는 것이고, 전도는 복음을 받아들인 자만이 할 수 있는 이해불가의 행위이고, 전도는 합당한 대가를 기대할 수 없는 행위이고, 오히려 전도는 세상으로부터 온갖 비판과 모욕과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받기에 충분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도가 미화되었다면, 그것은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 근본을 오염시킨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러한 미화의 바탕에는 이성에 기반한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성공과 성과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


교회는 대형화를 꿈꾸고 있고, 정치․경제․사회․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를 꿈꾸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은 지체로서의 교회가 하는 행태가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속이는 행태이다.


왜냐하면, 전도나 복음에는 세상이 바라 마지않은 찬란함이나 영예나 권력이나 재물이 없기 때문이다. 전도나 복음은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이 문제인가?


지금 한국 교회가 꾸는 꿈은 계몽주의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꿈과 같다. 말로는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상고 없이, 그저 면죄부나 위로의 도구쯤으로 치부한 채, 그들 스스로가 규정한 선한 노력과 봉사만(그것 역시 그들이 생각하기에 선한 노력과 봉사일 뿐, 공인받은 적이 없다)으로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인간상과 사회상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이유에서 그 목적한 것을 관철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과제를 제시하고, 그 과제의 완수를 독촉하고, 하나님과 관계없는 과제의 완수를 통하여 성장을 꾀하고, 그렇게 성장된 힘을 통하여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계몽주의의 미몽이다. 밑도 끝도 없는 발전과, 그것을 위한 노력과, 그 노력을 평가하기 위한 성과를 피라미드처럼 세운 계몽주의의 미몽이란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계몽주의에 대한 집착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