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 - 실체와 양태

철학(哲學)인가? 철학(鐵學)인가? 3

by 시인 손락천

존재론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코기토에 힘입어, 생각하는 나를 신과 자연세계로부터 분리시켰다. 이로서 신과 자연세계는 인식의 객체가 되었고, 이는 사유하는 특별한 존재인 나로 인하여 인식되고 지배당하는 수동적 대상이 되어 버렸다. 즉, 이것은 대상과 일치하는 인식의 문제와 관련된 과학주의와 반자연주의 발로가 된 셈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서 스피노자는 독특한 사상을 구축한다. 즉, 스피노자는 모든 실체는 하나이고, 그 실체가 여러 가지의 양태를 나타내는데,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 실체의 양태로서 표현된 것이고, 사람 또한 그 양태의 일부분일 뿐,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고 한다.



이것은 실체를 ‘연장’과 ‘사유’로 인식한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직접적으로 타격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내가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인식하였다고 해서, 연장으로서의 활활 타오르는 횃불과 사유로서의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실체 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즉, 활활 타오르는 횃불에 대한 사유가 없더라도 실제의 활활 타오르는 횃불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아울러 설사 내가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사유하였다고 하더라도, 실제의 횃불은 활활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사그라드는 횃불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유가 실체를 형성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실체는 하나이고, 다만 그 실체는 양태로서 표현된다고 한다. 예를 들면 나는 회사에 가면 말끔한 차림의 말 잘 듣는 직원으로, 길거리에서는 과격한 차림의 용감한 시민으로, 집에서는 추레한 차림의 자상한 남편으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상황과 목적에 따라 그 역할과 모양을 변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령 ‘나’라는 실체가 있다면, ‘나’는 바로 위와 같은 양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생각하는 나(데카르트의 주체)’ 또한 하나의 양태일 뿐, 실체가 아니라고 한다. 즉, 실체는 타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원인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자연일 뿐이고, 삼라만상은 이러한 자연의 양태인데, ‘생각하는 나’ 또한 다른 삼라만상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양태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인식론


스피노자의 존재론은 “실체가 양태로 표현된다”는 것인데, 그 실체라는 것은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자연 그 자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실체로서의 자연이 여러 가지 양태로 나타나는데, 이에 따르면 사람 또한 그 양태의 일부분일 뿐이라고 보았다. 즉, 위 명제를 재해석하면, 실체는 구체적인 양태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그래서 자연은 개개의 자연세계를 이루는 것들, 예를 들면 사람, 사자, 물고기, 나무, 풀, 산, 강, 바다, 바람 등으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서 인식론이 나온다. 양태는 여러 가지 속성으로 표현되고, 사람은 이러한 속성을 인식함으로써 양태를 인식한다는 것인데, 이 역시 데카르트의 인식론을 직접적으로 타격한 것이었다.



즉, 데카르트의 방식으로 본다면 하나하나의 양태는 실체이고, 그것은 ‘연장’과 ‘사유’로 존재한다는 것인데, 스피노자는 이에 반하여, 양태는 실체의 존재양식일 뿐이고, 소위 말하는 ‘연장’과 ‘사유’는 양태의 속성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개라는 양태는 현실상의 개(연장)와 관념상의 개(사유)로 존재하고, 그것이 서로 일치한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존재론과 인식론이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현실상의 개와 관념상의 개는 개라는 양태의 속성일 뿐, 결코 개가 위와 같은 두 가지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현실상의 개만 있다면 그것이 개인지, 사자인지, 노루인지를 알 수 없는 것이고, 관념상의 개만 있다면 그 개는 짖지도 못하는 허상이 되고 말 뿐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이와 같은 연장과 사유가 양태의 속성 중의 일부분일 뿐이고, 그러한 속성들은 양태에서, 양태는 다시 실체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그 속성들인 현실상의 개는 자연스럽게 관념상의 개와 일치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인식체계를 따를 경우, 주체가 인식하는 개가 실제의 개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이를 담보하는 제삼자를 필요로 하게 되고, 이는 다시 그 담보를 담보하는 제삼자를 필요로 하게 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무한 소급되는 원인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실체는커녕 양태마저도 인식할 수 없게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에 대하여 [그가 이러한 맹점을 피하기 위하여 신에게 대항했으면서도 비겁하게 다시 신에게 의존하여 이 문제를 회피하려고 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이성으로서 위와 같은 무한 소급을 중단하고자 하였던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로써 스피노자는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도덕론


스피노자는 이성으로서 육체의 감성과 정념을 절제시켜야 한다는 데카르트식의 이성적 계몽주의를 반대하였다.



스피노자는 [이성과 육체의 감성 및 정념은 사람이라는 양태의 속성일 뿐이므로, 이는 합일적인 것이어서, 어느 하나의 요인이 다른 요인을 통제하거나 절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즉, 이성과 육체의 감성 및 정념은 사람을 표현하는 하나하나의 속성이고, 사람을 움직이는 하나하나의 힘인데, 이것은 양자를 합일시키려는 코나투스(무엇인가를 합치시켜 지속시키려는 힘)에 의하여 일치하게 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이성이 육체의 감성 및 정념을 설득하여 그에 부합하도록 움직이기도 하고, 육체의 감성과 정념이 이성을 설득하여 그에 부합하도록 움직이기도 한다는 것인데, 예를 들면 어떤 노인이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것을 인식한 이성이 육체의 감성과 정념을 설득하여 짐을 대신 들어주게 하기도 하고, 배고픔을 느낀 정념이 이성을 설득하여 그러한 봉사를 제쳐두고 밥을 먹도록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이성과 육체의 감정 및 정념이 코나투스에 의하여 합치되어 어떤 생각이나 행위가 나오는 것이라면, 당연히 특정한 생각이나 행위가 나오도록 하게끔한 환경을 만들어주면 자연스럽게 코나투스에 의하여 이성과 육체의 감정 및 정념이 서로를 설득하여 그 설정된 환경에 부합하는 생각이나 행위를 하게 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바람직하고 풍요로운 삶과 사유를 위해서는 위와 같은 방식의 환경을 창출함으로써 사람의 사상이나 행위를 통제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윤리학이 지향해야 할 바라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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