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哲學)인가? 철학(鐵學)인가? 9
칸트의 견해를 전면적으로 비판하였다
헤겔은 고전철학을 집대성하였고, 이후의 탈근대와 포스트모던 시대에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객체(인식 이전의 객관적인 것)와 현상(인식으로 받아들여진 주관적인 것)의 구별, 현상을 인식케 하는 선험적 조건 형식(감성 형식, 오성 형식) 등에 대한 칸트의 견해를 모두 비판한다.
왜냐하면 객체 자체에 대한 논의 없이 객체를 논하는 것, 선험적 조건 형식에 대한 근거 없이 그것의 존재를 논하는 것은 공허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를 차용하였다
얼마 전에 이야기했던 스피노자에 의하면, 실체는 하나(자연)뿐이고,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그 실체가 표현된 방식이라고 했다. 즉, 스피노자는 “실체는 양태로 표현된다”는 한마디로 이것을 설명했다.
헤겔은 이러한 논리를 차용하여, 절대정신이 주체, 사회, 객체 등으로 외화 된다고 했다. 즉, 헤겔은 실체라는 개념에 절대정신을, 양태라는 개념에 주체와 객체를, 표현이라는 개념에 외화를 각 대입한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스스로를 스피노자의 제자라고 자청하기도 하였으나, 사실은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자연주의를 근대철학의 주제에 부합하도록 재편성한 것이다.
변증법을 입다
어찌 되었든, 헤겔에 따르면 절대정신이 주체, 객체로 외화 되었다가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복귀한다고 한다. 이는 주체와 객체는 물론이고 사회, 역사 등도 모두 절대정신이 목적하는 바에 따라 외화와 회귀를 반복함으로써 형성, 발전, 변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절대정신 안에서 하나로 포섭되는 것이므로, 굳이 이러한 것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객체와 현상을 구별시키거나 판단 형식이나 감성 형식 등의 개념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절대정신의 변증법은 피히테의 ‘자아’ 개념을 차용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피히테는 주체와 객체를 설명함에 있어, 먼저 ‘경험 등 모든 것의 설명의 근거’가 되는 자아가 정립하고, 그다음에 자아가 비아(객체)를 정립하고, 그다음에 자아가 가분적 자아에 대하여 가분적 비아(객체)를 정립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살아 움직이는 내가 있는데, 내가 빵을 보고 그에 대한 인식을 내 속에 정립하고, 최종적으로 그것을 내가 먹어야 하는 빵으로 정립하여, ‘나’라는 주체가 ‘빵’이라는 객체를 먹는 것으로 인식하여 먹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정신의 변증법이라는 것 또한 개념상의 차이는 있지만, 테제-안티테제-진테제라는 변증법의 방식이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시대의식이라 하였다
헤겔에 따르면 현실 세계는 절대정신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 즉 절대정신이 외화(그 정신이 어떤 방향으로 형성한 객체, 즉 그것은 물리적인 법칙일 수도 있고, 사회적이거나 역사적인 가치일 수도 있다)하였다가 다시 포섭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절대정신의 산물은 그 시대를 지배하는 시대의식에 따라 평가받는다고 한다.
가령, 물리적 현상에 대한 지식은, 이에 대한 당대의 시대의식, 즉 뉴턴의 시대에는 뉴턴 과학에 의하여, 갈릴레이의 시대에는 갈릴레이의 과학에 의하여, 아인슈타인의 시대에는 아인슈타인의 과학에 의하여 참과 거짓이 판단된다고 본다.
이와 같이 절대정신은 변증법에 의하여 끊임없이 주체와 객체를 외화 하여 시대의식을 낳고, 당대의 지식을 산출하는데, 헤겔은 이러한 흐름이 종국적으로 진리를 지향한다고 본 것이다.
자신의 대에서 역사의 완성을 선언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그의 논리에 충실하게 되면, 주체와 객체, 그리고 진리에 대한 그의 견해 또한 절대정신의 변증법 아래 놓인 것이므로, 후대에 이르러서는 시대의식의 변화에 따라 그의 철학이 참된 것에서 거짓된 것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 자신의 당대가 이미 절대정신이 완성된 시대, 따라서 더 이상의 시대정신이 있을 수 없다고 함으로써, 자신의 철학을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단정 시켜 버렸다.
이것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인식을 설명하기 위하여 근대철학이 취하게 된 논리의 독단성, 즉 판단의 근거로서의 주체와 그가 가진 인식능력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것들에 대하여 설명 불가의 능력을 부여해버린 독단성을 비판하려다가, 오히려 그 자신이 역사와 과학과 철학의 종말을 선고해 버리는(왜냐하면 절대정신이 완성되었으므로, 더 이상 이를 위한 사상이 있을 이유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무후무한 독단을 불러오게 된 것이다.
이것은 헤겔이 학자로서 가진 욕심의 발로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이러한 헤겔의 연구는 지독한 독단성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지닌 설득력과 독특한 견해로 인하여 이후의 마르크시즘, 언어학, 구조주의 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