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哲學)인가? 철학(鐵學)인가? 8
칸트에게 중요한 것은 객체 그 자체가 아니라 객체에 대한 주체의 인식(현상)이고, 그것이 곧 진리문제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분석판단이든, 종합판단이든, 선험적 종합판단이든 간에 그러한 인식이나 사유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가 칸트 철학의 중요한 과제였다.
순수이성
칸트는 주체가 현상을 인식하는데는 주체에게 선험적 감성형식과 선험적 오성형식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체에게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감성형식이 선험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즉, 어떤 객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나 시간에 대한 감성형식이 없다면, 주체는 어떤 것도 인식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감성형식은 주체로 하여금 객체에 대한 인식을 가능케하는 장치이고, 이러한 감성형식은 모든 인간이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받아들여진 현상은 주체가 가진 선험적 오성형식에 따라 참된 현상으로 인식된다고 한다. 즉, 어떤 객체에 대한 물리적 인식은 인간이 가진 “양, 성질, 관계, 양상에 관한 12가지 범주”에 따라 파악되는데, 이러한 오성형식에 의하여 모든 주체가 객체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즉, 감성형식으로 받아들여진 객체를 오성형식으로 통일성 있게 구성함으로써, 사람은 주체와 객체의 일체화 된 개념, 나아가 연역과 귀납적인 추론을 통한 법칙발견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순수이성(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의 요지이고, 그가 제시한 객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가능성이다.
실천이성
그렇다면, 이렇게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주체가, 과연 어떤 방식으로 행동을 하는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즉, 사유의 범위내에서만 진리에 도달할 뿐이고, 행동이 그러한 사유에 미치지 못한다면, 신으로부터의 자유는, 무수한 주체들의 방종으로 인해, 인류에게 진리에 대한 미완의 가능성만을 남긴채 자멸의 길로 걸어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그가 진리문제를 사유주체의 내부로 끌어들였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다시 말해, 칸트로 인하여 진리문제는 개별 인식주체의 주관으로 포섭되었고, 이 때문에 개별주체는 비록 일정부분에 있어서는 공통된 인식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다른 일정부분에 있어서는 전혀 공통된 인식을 가지지 않을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돈키호테와 산초는 감성형식에 따라 거대한 풍차를 인지하게 되지만, 돈키호테는 자신의 오성형식에 따라 여러 가지 범주로 분석하여 이를 거대한 괴물로 인식해 버린 반면에, 산초는 이를 풍차로 인식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한가? 산초라면 그런 허황된 짓을 안했겠지만, 돈키호테는 정의실현을 위해서 풍차를 파괴하는, 결과적으로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칸트에게는 이러한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가장 큰 당면과제였던 것이고, 이에 대한 논의가 바로 그 유명한 ‘실천이성비판’이다.
칸트는 사람의 행동을 규율하는 도덕(법)을 내세운다. 도덕률(법)에 의한 행위규율이야말로 사람으로 하여금 조화롭고 합리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하면서 동시에 진리에 이르는 사유를 할 수 있게끔 하는 최선의 방책이었던 것이다(이것은 스피노자의 윤리학과도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다).
이 때문에, 칸트는 “자유란 도덕률(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인류로 하여금 행위를 함에 있어 보편적 입법원리에 맞도록 하라고 권고한다. 바로 이러한 점이 공화주의와 법치주의를 주창하는 그의 법철학인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이 전혀 다른 개념이라는 점이다.
순수이성은 진리를 사유토록 하는 것인 반면에, 실천이성은 순수이성과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이, 단지 도덕률(법)에 따라 행동하도록 하여 순수이성의 활동을 보장케하는 역할을 할 뿐인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그는, 순수이성의 영역에서는 신적인 존재가 올바른 인식을 형성함에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방해물이기 때문에 이를 추방해 버렸지만, 실천이성의 영역에서는 원활한 도덕률(법)의 강제를 위해서는 신적인 존재가 필요하다고 해서 그 개념을 받아들이게 된다. 즉,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실천이성이 자신의 실현 도구로서 신을 차용한 것이다.
이와 같이 칸트는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나눔으로써, 정신적 사유와 물리적 행위를 구분해 버렸는데, 이는 진리를 주관화시킨 데서 비롯된 당연한 논리의 귀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