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哲學)인가? 철학(鐵學)인가? 10
객체와 진리의 문제를 달리 보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자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유물론자가 아니다. 만약 그가 단순한 유물론자였다면,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유물론자인 포이어바흐는 “사람은 자신이 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즉, 사람은 단백질 덩어리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에게 있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어떤 사람도 다름없는 단백질 덩어리일 뿐이므로, 그것을 뛰어넘는 특별한 존재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관념적인 방해물을 제거하고 지각과 감성으로 대상을 관조하게 되면 객체의 본질을 알 수 있는데, 그렇게 관조해 보면 사람은 사랑과 의지를 가진 단백질 덩어리이고, 이것이 사람에 대한 정의이자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사상을 거부한다.
유물론을 거부하고 관념론을 택했다는 것이 아니다. 객체를 객체로만 보는 유물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유물론에서는 어떠한 비전이나 진리도 발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지각과 감성으로 객체를 관조한다고 해서 객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나 지식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즉, 객체는 그것에 대한 사람의 생활과정, 실천과정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한다. 사람의 실천으로 인하여 형성된 여러 가지 관계와 가치관, 이를테면 사회적 맥락과 역사속에서 객체가 정의되어야 하고, 그것이야말로 객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라고 한다.
가령, 중세시대의 성에 대하여 고찰하면, 그것은 예전에는 봉건영주의 권력에서 나오는 통치와 권위의 상징이자 사회체제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단지 하나의 문화유산이자 관광자원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중세시대의 성은 똑같은 건축물로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의 본질은 시민혁명이나 산업혁명과 같은 실천에서, 그리고 그와 같은 실천으로 인하여 형성되거나 변화된 사회의식 속에서 다르게 파악된다. 즉, 객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실천과정에서의 인식이고, 이와 같이 객체가 당대의 사회적 맥락과 역사 속에서 정의되어야 그것이 비로소 올바른 지식이자 당대의 진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이 당대의 사회적 의식 속에서 객체를 인식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어떻게 올바른 인식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는 이에 대해서 ‘현실성과 힘’의 논리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부시맨이 콜라병을 곡식을 찧는 도구로 인식하였고, 그러한 사용이 부시맨 사회의 공통된 양식이라면, 최소한 부시맨 사회에서는 콜라병은 콜라를 담는 병이 아니라 농기구라는 것이 부시맨 사회 당대의 현실성과 힘이고, 따라서 그것이 콜라병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자 지식이라는 것이다.
근대철학의 주체를 해체하다
마르크스의 주체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인간을 관조한다고 해서 고정적인 인간의 본질을 정의할 수는 없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 역시 그가 맺고 있는 여러 가지의 사회적, 역사적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
예를 들어, 흑인은 자유인이었다. 그러나 서구인에게 납치된 이후에 그는 노예가 되고, 그러다가 사회적 의식의 변화에 따라 다시 자유인이 된다. 즉, 흑인은 그가 맺고 있는 사회관계 아래에서 혹은 자유인이 되기도 하고 혹은 노예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인간을 자명하고 고정적이며 주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정의하면서 근대철학의 지반이 된 주체에 대한 개념을 해체해 버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