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 구조주의의 가변성

철학(哲學)인가? 철학(鐵學)인가? 18

by 시인 손락천
이성과 비이성은 각 시대의 주된 인식의 틀에 의하여 판단되고 결정되는 것이어서, 교육되어져야 할 비이성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푸코는 이성과 비이성,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하였다.


그는 이성적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과 정상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의 이면을 사유함으로써, 그러한 경계는 다만 각 시대의 요구에 따라 변화되어 나타나는 것일 뿐, 자명하게 이성적이라거나 자명하게 옳은 것을 구분 지을 경계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를 광인에 빗대어 설명하면, 르네상스 시대에는 광인을 독특한 사유방식과 생활방식을 가진 사람으로 이해하다가, 고전주의 시대에는 격리시켜 가두어 둠이 마땅한 위험한 존재로, 근대 시대에는 가두어 두어야 할 존재라기보다는 치료가 필요한 존재로 각각 다르게 이해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각 시대마다 광인을 보는 인식의 틀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즉, 르네상스 시대에는 ‘유사성’이, 고전주의 시대에는 ‘표상’이, 근대에는 ‘실체’가 세계를 이해하는 틀이었기 때문에, 르네상스 시대에는 유사성에 의하여 광인을 인간 내면의 한 특성이 부각된 사람으로서 인정한 것이고, 고전주의 시대에는 나타난 표상의 구분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광인을 위험하여 가두어 버려야 할 존재로 전락시킨 것이고, 근대에는 표상에 귀환하지 않는 실체(칸트의 생각처럼 주체에게 있어서 진리문제는 사유하여 인지한 대상에 대한 것일 뿐, 그 사유한 대상이 실제의 대상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를 인정하였기에 광인을 감금하여야 할 대상이 아니라 치료하여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성과 비이성은 각 시대의 주된 인식의 틀에 의하여 판단되는 것이어서, 교육되어져야 할 비이성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고찰은 결국 구조주의의 다른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결국 이러한 고찰 역시 이성과 비이성의 기준을 각 시대의 구조화된 인식틀에 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의 틀은 도대체 어떤 연유로 형성된 것일까?



푸코는 바로 이러한 인식의 틀이 당대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의지에서 나온다고 했다(이것은 니체의 계보학을 차용한 것이다).


즉, 당대의 지식권력이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하여 어떤 질서와 관계를 자신의 의지에 따라 규정함으로써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를 형성하는 것이고, 아울러 같은 이치로 생체권력이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하여 성(性)과 관련된 질서와 관계를 자신의 의지에 따라 형성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주체와 대상은 현실의 모양 그대로에 대해서 관조한다고 하여 그것의 실체가 파악되거나 그에 대한 참된 지식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그것되게 한 권력의지를 관찰함으로써, 주체와 대상에 대한 현실의 모양이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



결국은 계보학을 차용한 구조주의의였다.



그렇다면, 푸고의 논지 역시 [주체와 대상에 대한 관념이 외부요인에 의하여 형성된다는 것]에 다름없다.

다만, 이것이 기존의 구조주의와 다른 점은 그 구조가 시대에 따라 가변하는 것이라는데 있을 뿐이고, 그 논리적 배경에 니체의 계보학이 차용되었다는 데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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