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 논쟁 - 철학적 문제의 처음과 끝 1

철학(哲學)인가? 철학(鐵學)인가? 19

by 시인 손락천
보편 논쟁이 야기한 사상적 변곡점으로 인하여, 우리는 아직 모던에도 포스트모던에도 속하지 못하게 되었다.



여러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았지만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고대 철학과 중세철학에서, 중세 철학과 근대철학에서, 그리고 근대 철학과 현대철학에서 사상적 변이를 보인 가장 중요한 맥락은 존재론에 관한 견해의 대립이었다.


즉, 다름 아닌 존재론에 대한 보편 논쟁이 사조의 변곡점을 이룬 핵심이었고,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포스트모던이라는 현실의 사유에 머물면서도, 아직 모던이라는 과거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보편 논쟁의 요지는 이른바 유명론과 실재론의 대립이라고 부르는 중세시대의 논쟁으로 대변될 수가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것’에 대하여 과연 그것이 개념상으로만 존재하는 명목일 뿐이냐 그렇지 않으면 실제로 실재하는 것이냐에 대한 사상적 논쟁이었다.


예를 들면 사유의 주체로서의 인간이 있다고 하자. 실재론의 입장보편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것이 있고, 그러한 존재 이후에서야 A, B, C라는 개별적인 개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유명론의 입장A, B, C라는 개별적인 개인만이 존재하고, 보편적인 개념의 인간이라는 것은 이들을 통칭하여 부르는 개념상의 이름일 뿐이라는 것이다.



실재론은 그리움 같은 존재였다.



실재론의 입장을 취한 어거스틴은 강력한 존재론을 구성하였던 플라톤의 사상을 차용하여 기독교 사상을 설명하였다. 즉, 플라톤은 이데아가 실재하고, 인간의 지식은 이데아에 대한 기억의 파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진리가 실재하는 이데아를 온전히 기억해내는 것이라고 하였고, 그 결과로 이데아의 자리에 하나님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을 이어받은 아퀴나스는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차용하여 실재론을 보완하였다. 즉, 형상과 질료라는 개념인데, 예를 들어 의자를 생각하였을 때, 의자를 이루는 질료는 나무이지만, 만약 의자라는 형상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 나무를 조합하여 의자를 만들어 내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의자라는 형상 또는 설계도가 존재하지 않으면, 그 질료가 되는 나무가 있더라도, 그것은 나무 조각일 뿐, 의자를 형성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아퀴나스는, 예를 들어, 인간이라는 형상(사상 혹은 설계도)이 먼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간이 인간으로 창조되지 못했을 것이므로, 인간이라는 보편자는 개별자보다 먼저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보편자는 언제나 그리움 같은 존재일 뿐, 한 번도 그 실재가 입증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보편자는 언제나 그리움 같은 존재일 뿐, 한 번도 그 실재가 입증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즉, 사람에게 인식되는 것은 보편자가 아니라 개별자일 뿐이고, 사람은 그러한 개별자를 관찰함으로써 상위 개념으로서의 보편자를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실재론과 유명론의 충돌은, 결과적으로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근대철학의 보편론적 실재론을 숙성시키는 계기가 된 동시에, ‘인식 주체의 경험을 지식의 연원이자 진리의 근거’로 보는 유명론적 경험론의 지반이 되었고, 결국에는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으로 대변되는 모던 세계와 마르크스, 니체, 푸코 등으로 대변되는 포스트모던 세계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존재에 대한 물음의 처음과 끝인 실재론과 유명론의 거친 다툼에서 손을 놓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살아야 하니까. 살려면 살아야 할 이유가 필요하니까. 그리고 그 이유에는 스스로 인정하고 두둔할만한 근거가 있어야 하니까.


논쟁은 거칠었지만, 논쟁의 맥락을 살펴보면 그 중심은 늘 하나였다. 결코 복잡할 것이 없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를, 그리고 '나'라는 존재의 외연이 확대된 ‘우리’라는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로 귀결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사상적 소용돌이 속에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어느 편에 서 있는 것일까? 보편적인 존재 또는 가치를 인정하는 실재론에 서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러한 보편자를 부인하고 개별적 존재 또는 가치만을 인정하는 유명론에 서 있는 것일까?


그러나 어느 편에 서 있더라도 상관없다. 사상적 흐름은 어느 하나도 온전한 근본의 형태로 남아 있을 수가 없고, 서로 차용될 수밖에 없으니까. 다만, 존재하는 이상, 존재에 대한 물음의 처음과 끝인 실재론과 유명론의 거친 다툼에서 손을 놓지 말아야 할 뿐이다.


왜냐하면, 살아야 하니까. 살려면 살아야 할 이유가 필요하니까. 그리고 그 이유에는 스스로 인정하고 두둔할만한 근거가 있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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