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묻다 1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 갑자기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보게 되고, 그 문제가 해결되는 상황을 맞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가령, 감당할 수 없는 빚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연유로 인해 그 모든 빚이 면해진다면 어떨까?
달리 가정하여, 감당할 수 없는 외사랑을 하였는데, 갑자기 외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어떨까?
삶에서 흔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그렇기에 그와 같이 억지스러운 상황을 상정하여 질문하는 것 자체가 곤란한 일일 수도 있다.
니체는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러한 원함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대답하였다.
서양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다.
즉,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놓고, 혹자가 ‘꽃이 아름답다, 저녁노을이 아름답다, 지나가는 여인의 몸매가 아름답다’라고 대답을 한다면, 다시 묻기를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 모두가 아름답다고 한다면 거기에 공통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냐’라고 하는 방식이다.
눈에 보이는 가상들이 아닌, 실제로 그것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본질’이 무엇이냐는 것인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명한 진리가 무엇이냐에 몰두할 때, 니체는 이에 대하여 비판적인 물음을 던졌다. ‘어떤 것이 아름다운 것이냐?’라고.
이 물음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예를 들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물음의 진짜 의도는 ‘너는 왜 아름다움에 대해서 묻는 거지?’ 혹은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이 왜 필요한 거지? 무엇을 하려고?’라는 것에 있다.
결국 누군가가 무엇에 대하여 정의를 하려고 한다면, 그가 그것을 정의하려고 하는 목적, 그러한 정의를 통해 무엇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처음부터 자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다만 무엇에 대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원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 원해서 나오는 것으로, 그것이 바로 ‘의지’라고 한다.
어떤 의지나 가치를 바탕으로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바라고, 사모한다고 했을 때, 의지나 가치가 시키는 대로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나름의 투쟁이며 힘듦이다.
니체는 바로 그런 투쟁과 힘듦을 통해 비록 자명하지는 않지만, 스스로에게서만은 오류로 인식되지 않을 만한 그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고매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뜻밖의 요행으로 원하는 것을 얻었다면, 그 상황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런데,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그 무엇으로 인해, 전혀 개입을 예상하지도 않았던 그 무엇으로 인해, 갑자기 그토록 바라 왔던 그 무엇인가가 실현된다면 어떨까?
감사할 수도 있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릴 수도 있고, 반발할 수도 있고, 변화된 상황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고, 변화된 위치나 지위에 부적응할 수도 있고, 기뻐하여 옛일을 털어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할 수도 있다. 혹은 이와 같은 생각을 잠시 하였다가 다시 일상에 묻힘으로써 무심히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인문학은 이러한 성취에 대하여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는다. 왜?
요행이란 거론할만한 인문학적 깜이 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요행 앞에서는 철학도, 인문학도 무용한 것이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