흄과 마르크스, 내려놓음 앞에 선 인문학

인문학을 묻다 5

by 시인 손락천
맑스는 [사람이란 오롯이 스스로 선 존재가 아니라, 관계(현실과 힘) 속에서 규정되는 존재]라고 했다.



맑스는 인간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했다.


사람이란 존재는 오롯이 스스로 선 존재가 아니라, 관계(현실과 힘) 속에서 규정는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 맑스가 혁명적인 실천을 통하여 세상의 변화를 도모한 혁명가이기에, 자신의 목적에 부합한 인간상을 기술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맑스와 흄의 생각은 서로 닮았다.



사회적 관계의 총체. 이러한 맑스의 인간관은 흄의 그것무척 닮았다.


흔히 흄을 근대적 철학의 범주 내에서 근대적 철학의 문제 설정을 해체한 사람이라 하고, 맑스를 근대적 철학의 범주 외에서 근대적 철학의 문제 설정을 해체한 사람이라고 한다.


즉, 비록 그 배경과 의도 그리고 표현방식이 달랐지만, 사람에 대한 이해는 [스스로 스스로의 존재를 확정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으로 공통되게 근대적 주체(진리로 향하는 독립된 사유로서의 주체)의 대척점에 섰던 것이다.



어찌 사람이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기만 할까. 그러나 이러한 반론은 이미 사람이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기도 하다는 뜻을 내포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일리 있는 말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아무리 사람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과 분석이었다 하더라도, 어찌 사람이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기만 할까?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사람이 여러 상황에서 자신의 속사람과 겉사람의 차이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유는 자신 역시 맑스와 흄의 사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해 아래 새것은 없다. 고된 것이 있을 뿐이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솔로몬의 이야기.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 것이라는 이야기.


어찌 옛사람이라고, 현재 사람이라고, 미래 사람이라고, 맑스나 흄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하기에 진리를 찾는 사람의 마음은, 행복을 찾는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고되고 힘든 것이다.


첨예한 관계 속에서, 현실과 힘 앞에서, 뜻을 세우고 무엇인가를 해야 하니까. 그것이 의무니까. 그래서 끊임없이 속사람과 겉사람이 갈등해야 하니까.


힘써 싸워왔던 세월이 있고, 그것으로 인하여 인정받아 무엇인가를 쟁취한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사람은 스스로를 자랑할 만하겠지만, 흄과 맑스는 그러한 발견과 업적과 가치를 넘어, 사람이 왜 그러한 것을 바라왔던 것인지, 그래서 그 모습이 어떠한지, 그리고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연원이 결국 스스로가 여러 관계 속에서 형성한 믿음에 있다고 보고, 그 믿음 자체를 착취와 같은 부조리에서 옳은 것으로 바꿔야 할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결국 인문학은 내려놓음에 대한 담론이다.



그렇다면, 결국 표현과 접근 방법이 다르지만, 인문학이 사람에게 던진 화두겉사람의 어렵고 고단했던 짐을 내려놓으라는 것이 아닐까?


눈치와 체면, 당위와 의무, 욕심과 겉치레, 단호한 신념과 고집. 그러한 것들을 내려놓고 내면의 정당하고 긍정적인 믿음과 확신대로 스스로와 세상에 마주하라는 것이 아닐까?


관계의 전위를 무릅쓰고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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