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묻다 6
[사람은 자신이 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 왜냐? 단백질 덩어리니까.]라고 한다면, 그것은 낭만을 잃은 사유다.
포이어바흐는 관념적인 방해물을 제거하고 지각과 감성으로 대상을 관조하게 되면 객체의 본질을 알 수 있는데, 그렇게 관조해 보면 “사람은 단백질 덩어리이기 때문에 자신이 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라고 한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단백질 덩어리이긴 하지만, 사랑과 의지를 가진 단백질 덩어리이고, 그것이 전체적인 맥락의 사람에 대한 정의라고 한다.
성경의 [태초]라는 구절에 대하여 그것이 역사적인 시점이냐, 역사 이전의 시점이냐를 논박하는 것 역시 낭만을 잃은 사유다.
성경에서,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고,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때의 ‘태초에’는 동일하게 'in the beginning'으로 번역된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 원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위 ‘태초’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 창세기의 ‘태초’는 시간과 공간의 시작, 즉 역사의 시작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요한복음의 ‘태초’는 역사의 시작이 있기 이전의 때(창조 이전, 시공이 있기 전, 시공을 초월하였기 때문에 시공에 존재하는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어느 때)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인식의 근거가 시간과 공간인데, 그것이 없는 어느 때라는 것은 인식의 범위를 벗어난 것,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 의미가 없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창조 이전(시간과 공간이 있기 이전)의 어느 한 때로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이 두 가지의 이야기를 함께 한 것은 그것이 서로 닮은 방식의 사유인 까닭에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낭만을 잃은 사유 방식이다.
사람을 단백질 덩어리로 정의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 그리고 ‘태초’라는 것이 천지창조의 시점인지 그 이전인지는 사람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문제는 모두 사람이 이해하기 곤란한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즉, 알 수 없거나 제대로 알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러한 상태, 그대로인 채로 두어야 한다. 만약, 그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완전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강박에서 비롯된 것일뿐더러, [낭만의 상실]인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사람은 단순한 단백질 덩어리가 아니라는 것]이고, [창조 이전에 창조의 주체가 없었다면 창조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였을 것]이란 점이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동시에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부분을 함께 가졌고, 때로는 인식범위(시간과 공간)에 포함되지 않은 속성까지 보인다.
마찬가지로,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 신은 전혀 자연의 일부인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속성을 가졌고, 언제나 사람의 인식범위(시간과 공간) 밖에 있었다.
굳이 그러한 존재를 사람의 인식 범위 내로 제한시키는 것이 옳은 일일까?
사람이든 신이든 사람의 인식을 통해서만 존재하여야 한다는 것은 독단이다.
사람이 아무리 자신을 관조한다고 하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에 머물 뿐,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스스로 다가갈 아무런 방법이 없다.
한편, 요한복음의 태초가 창세기의 태초와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의 논란은 요한복음의 ‘말씀’이라는 구절에서 비롯된다.
요한복음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구절에서 [말씀]은 ‘로고스’로 번역된다. 그런데, 이 ‘로고스’라는 단어를 ‘이성’으로 이해하게 되면 이성은 분명히 시간과 공간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될 개념이기에 시간과 공간의 시작인 창세기의 태초와 같은 때가 되고, 그것을 ‘이성’으로 이해하지 않게 되면 로고스는 시간과 공간을 전제하지 않은 개념이기에 시간과 공간의 시작인 창세기의 태초보다 더 앞선 어느 때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표현한 [말씀]이 무엇 때문에 굳이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로고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일까?
세상에는 인식할 수 없는 것, 시간과 공간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언어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천지다. 사람도, 신도, 태초도 인식이나 언어의 틀 속에 한정시켜버릴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인문학에는 낭만이 필요하다. 낭만이 없는 인문학은 시체에 불과하다.
사람이든, 신이든, 태초든, 그러한 불확실한 개념은 달리 생각할 것 없이 그냥 그것 자체로 받아들이면 된다. 즉, 인식할 수 없는 개념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달리 해석하여 다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결국 인문학에는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낭만이 필요하다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인문학은 어리석은 질문이거나 불안 또는 불가능에 대한 고증학이 될 뿐이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