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불가능 앞에 선 인문학
인문학을 묻다 4
가령, 어떤 사람이 ‘사과’를 안다고 가정하자.
이것은 단지 그 사과의 생긴 모양을 안다는 것일 수도 있고, 그 사과의 맛을 안다는 것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이 개개인이 안다고 하는 그 사과는 각각의 시각과 접근 방법에 따라 특정된 사과이고, 결과적으로 그 개개인들로서는 자신들이 필요에 의하여 알아야 할 그 사과의 어떤 특성만을 알면 그만일 뿐, 달리 그 사과에 다른 의미를 둘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그는 사과를 아는 것일까?
사과를 바라보는 시각과 접근방법을 달리하여 보면 ‘누가, 어떤 종자로 어떻게 개량한 품종을, 언제 어디에 뿌려, 어떤 비료 등을 주어 몇 년간 어떤 방식으로 길러내어, 어떤 강수량과 일조량 아래에서 몇 미터의 어떤 모양으로 자란 사과나무에서, 언제부터 얼마의 사과가 열렸는데, 그중에서 어떤 것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수확하여, 어떤 모양과 어떤 빛깔과 어떤 맛을 지니게 되었는지의 여부’를 알아야 진짜 그 사과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안다는 것은 단지 피상적인 사유로서 그 존재 여부를 안다든가 특성 몇 가지를 안다는 것이 아닐 테다.
안다는 것은 자신이 취하고 싶어 하는 일부의 어떤 성향이나 특성을 아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그 존재와 의미, 그리고 그 숨결을 안다는 것일 테다.
그래서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나를 알고 있는가?
사람은 누구나 소외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소외란.
말 그대로의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지만, 달리 표현하자면 ‘무엇이 그 무엇의 본질로서 존재하기보다는 어떤 것으로부터 규정지어져 그 산물로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감각이나 판단을 통해 ‘사과’를 ‘사과’로 인식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그 ‘사과’의 본래 모습이 어떠한지는 알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과’로 알고 있는 ‘사과’는 인식된 것, 사유에 의해 만들어진 것, 사유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일 뿐, 본질로서의 사과가 아닌 것이다. 즉, 인식된 사과는 사유의 산물이자 사유에 의하여 소외된 그 무엇인 셈이다.
소외는 현대적 존재론에서 빠질 수 없는 개념이다.
현대적 존재론의 골자는 [나는 '나'그대로의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규정하는 ‘나’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본연 그대로의 ‘내’가 되기를 갈망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끊임없이 ‘나’를 표현하는 다른 기표를 찾는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무의식을 형성하고, 문화를 형성하고, ‘나’로서의 ‘나’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론은 결핍과 욕망의 끊임없는 변증법에 기초한다. 그리고 그 변증법은 다시 언어구조주의와 정신분석학에 뿌리를 둔다.
라캉은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며 데카르트를 비틀었다.
라캉은 모든 사람은 본질적으로 소외되어 있고,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데카르트의 제1원칙을 비튼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라고.
라캉의 이야기가 맞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사람에게서 사람을 빼앗아 버린 것이고, 스스로에게서 스스로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인문학이란 본질의 불가능에 대한 고증학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