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묻다 3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이미 항상 그러한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대로 부르면 그것은 이미 항상 그러한 이름의 것이 아니다
올바른 해석일까 싶지만, 일단 나는 도덕경의 위 구절을 위와 같이 해석했다.
나는 이러한 해석에 있어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화두는 그것 자체가 진리에 대한 서양철학의 탐구영역과 밀접한 관련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는 “이름은 이름일 뿐이다”라는 유명론의 입장을 한 줄로 표현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존재론적 입장에서 사유로서의 物과 본질적 존재로서의 物을 구별해 놓은 것 같기도 하며, 변증법적 입장에서 외화 된 자아와 외화 되기 전의 자아(따라서 이는 당연히 외화에서 복귀한 자아도 아니다)를 구별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구조주의적 입장에서 주체라고 믿는 것과 그 주체의 배후인 타자를 구별해 놓은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살펴보면, 이러한 모든 담론은 지식과 대상의 불일치를 설명하고 극복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인데, 그 연원은 열병처럼 앓고 있는 인류의 불안에 있었다.
인류의 불안. 그것의 다른 이름은 인류 자신의 진리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까? 자신이 진리에 도달하기 위하여 행한 사유와 행위가 과연 진리로 가는 올바른 경로일까?”라는 밑도 끝도 없는 물음의 악순환이 만들어 낸 불안인 것이다.
다만, 도덕경의 화두가 서양철학의 흐름과 다른 것은 그 화두 자체가 이미 지식이나 인식의 불완전성을, 환언하면 [대상에 대한 지식 또는 인식은 그것이 대상의 본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한 다음에, 그러한 대상의 본질은 지식이나 인식의 범주에서 벗어나 그것 자체의 본질을 깨달아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하였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이것은 또 하나의 모르쇠를 반복한 것에 불과할 뿐, 인류의 불안을 근원적으로 해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도덕경의 이 화두를 불안의 확증으로 명명하기로 하였다.
자아의 진리 가능성을 연구한 철학은 그 자체가 자아의 진리 불가능성을 역설한다.
즉,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이 이룩한 사상을 배경으로 할 때, 어떤 이가 “나는 이것이 이것이라고 생각해”라고 하는 순간, 그는 이미 “나는 진짜 이것이 이것인지에 대해서 의심하고 있어”라는 모순적 사유에 봉착하고 만다.
결국 인문학은 다른 이름은 [불안학]인 것이 아닌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이들은 “이것은 불가능한 방식이야”라고 불안해하면서도 항상 모양을 조금 달리하였을 뿐 같은 방식으로 진리를 이루려고 한다.
불안하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반복할 수밖에 없는 방식! 인문학이 이런 방식이라면, 결국 인문학은 다른 이름은 [불안학]인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