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클리와 흄, 존재 앞에 선 인문학

인문학을 묻다 8

by 시인 손락천
극단의 인식론자는 그 인식론으로 무너진다.



경험론자인 버클리는 대륙의 관념론을 비판하면서 지각되지 않는 것에 대한 실존을 배격하였다. 즉, 상상이나 논리적 비약에 터 잡아 인식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하면, 그것이야말로 독단이며 비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신이 아니어서 모든 것을 지각할 수가 없다. 지금 이 시간의 이 공간이 아닌 이상, 먼 시간의 무엇, 또는 먼 곳의 무엇은 그 존재함이 확실하더라도, 정작 현재의 그 자신은 그러한 실재를 지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스스로 [인류가 지각하거나 신이 지각하는 것은 설사 자신이 지각하지 못하더라도 존재한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즉, 그의 입론과는 달리, 가령 집에 있을 어머니나 도심에 있는 단골가게는 그가 지각하지 않더라도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었다.



극단의 고증론자는 그 고증론으로 무너진다.



같은 경험론자인 흄은 지각은 단지 습관일 수가 있다고 하였다. 가령 [스위치를 누르면 전등이 켜진다]는 것은 다만 그런 경우가 많아서 그렇게 인식하는 것일 뿐, 스위치를 누른다고 해서 반드시 전등이 켜지는 것은 아니므로, 이러한 인과관계가 실재한다는 것은 결국 습관적인 지각의 다발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체와 대상에 대한 지식은 경험과 관찰을 통하여 논리적으로 증명되어야 비로소 그 실재를 인정할 수 있다는 그의 입론은 난파를 면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경험과 관찰이라는 것도 결국은 지각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즉, 무엇을 지각하여 생긴 것이 인상이고, 그러한 인상의 기억이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 관념인데, 인식 주체인 ‘나’를 포함한 지각된 모든 존재가 단지 인상과 관념들의 집합체(달리 말하면 지각의 다발)라고 하여 버리면, 결국 인식과 대상의 일치라는 진리 개념과 인과관계라는 과학적 방법은 그 자체가 단지 습관적인 지각의 다발에 불과할 뿐이므로 불확실한 것이 되어 버리고, 아울러 인식 주체마저도 불확실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확실한 지식을 고증하려다가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회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삶과 노력의 의미가 상실되는 순간에 다름없는 것이었다.



결국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 담론의 기초여야 한다.



결국 버클리는 지각에 터 잡지 않은 관념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제거해가다 보니, 명백하게 존재하는 개별자에 대해서도 그 존재를 부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고, 그래서 다시 돌아와 [비록 인식이 없이도 존재하는 실체가 있다]는 것, 즉 존재론에 있어서 다시 [정신의 사유와 신의 사유]로 귀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흄 역시 지독한 회의주의에 빠진 후,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리냐가 아니라 무엇을 진리라고 믿느냐]에 있는 것이라며, 무엇이 진리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일단 어떤 것을 진리라고 믿게 되면 최소한 그렇게 믿은 자에게는 그것이 진리로서의 효과를 가진다고 하기에 이르렀다.



인문학의 기반은 존재에 대한 믿음에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저명한 철학자, 혁명가, 사회학자, 언어학자,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 등의 견해를 살펴보면, 사람의 사유는 불완전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주체의 인식이나 경험 또한 매우 불확실하다(필자가 아무리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연구의 가치를 폄하할 수는 없고, 또한 그러한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불확실성은 근대 철학과 현대철학의 전체적인 숙제였지만, 아직도 이것을 명확하게 해결할 길이 제시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보완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 큰 미궁을 불러올 뿐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미궁 투성이의 사상들이 오늘날의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지식과 신념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에 필자는 의문을 던진다.

우리는 이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냐고.

인문학의 기반은 존재에 대한 믿음이어야 하지 않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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