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묻다 9
문명과 비문명의 사이에 그것이 있었다?
레비 스트로스는 자연과 문화를 구분하는 출발점이 근친상간의 금지에 있다고 했다. 즉, 사람이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다가 전혀 이질적인 특성의 문명을 이룩하게 된 것은 사람이 스스로 근친상간을 금지한 데에 있었고, 그러한 근친상간의 금지가 사람에게 무의식화 되어 내재함으로써 영속적인 문명을 창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레비 스트로스는 인류라 칭해질 수 있는 존재의 시작점이 근친상간의 금지라는 사회적 무의식에 기반한 것이므로, 원시시대로부터 현대로 넘어오는 동안 근친상간의 금지가 스스로와 주변, 그리고 대상을 어떻게 결정짓고 관계 형성을 하였느냐를 살펴보는 것이 바로 인간과 문화를 이해하는 핵심이 된다고 하였다.
위험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입론은 매우 위험하다. 왜냐하면 사유의 주체인 [내]가 스스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근친상간의 금지에서 비롯된 내재화된 무의식, 그것도 정확한 이유를 알 수가 없지만, 어쩌다가 인류가 공통적으로 받아들여 내재화하게 된 무의식(그러하기에 이를 사회적 무의식이라 한다)]에 의지하여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강제된 사유를 하고 있다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반론은 간단하다.
무슨 DNA도 아닌데, 도대체 근친상간의 금지가 어떻게 망각되지 않은 채, 대대로 사람에게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원칙이 어떻게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는 것인가?
설사 그러한 원칙이 개별자에게 또는 전체 인류에게 안착한 사회적 무의식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만 비로소 사람이 사람답게 사유할 수 있게 되고, 문화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근거가 무엇이라는 것인가?
대관절 근친상간의 금지가 무엇 이관데 그러한 막강한 영향을 가졌다는 것인가?
습관적 오해가 아니었을까?
그러한 현상이 발견될 수도 있고, 그럴듯한 인과성이나 유사성이 발견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이유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나 근거가 없다. 그냥 가설일 뿐이고, 그의 생각일 뿐이다. 오히려 이러한 입론이야말로 흄이 말한 습관적인 지각의 다발, 전혀 확실하지 않은 오해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만약에 무의식이 강제한 방향대로 욕구를 비틀어 끊임없이 금지된 욕구를 대체할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것이 나의 사유이고, 나의 문화라면, 단언컨대 나는 그러한 사유와 문화를 미련 없이 던져 버릴 테다. 왜냐하면, 그것으로는 사람 답게 살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살더라도 황폐하게 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강박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전제와 그 전제를 기반으로 한 가설로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신의 질서는 현상적인 전제로서 밝혀낼 수 없는 신비이고, 신이 허락한 사유의 자유는 그 자체로서 풍요로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그 풍요로운 신비를 결코 풍요롭지 못한 메마름으로 치환하는 데에 열정을 쏟아 붙고 있다.
신비를 받아들일 수 없는 강박,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수 없는 강박, 하나의 전제를 기반으로 전체를 재단하려는 강박, 확신하지 못하는 지식으로 자유로운 사유를 폄하하려는 강박, 사유의 패턴을 일정한 의도대로 강제하려는 강박.
우리의 인문학이 취할 것은 사람에 대한 따뜻하고 신비로운 시선일 뿐, 결코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강박과 독선이어서는 안 된다. 때로는 차갑고 날카로운 비판과 분석이 멋있어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에 열을 올리다 보면 어느 듯 인문학은 사람에게서 죽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