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묻다 10
코나투스의 이름으로 온전한 하나가 될 것이라고 했다.
스피노자는 이성으로서 육체의 감성과 정념을 절제시켜야 한다는 데카르트식의 계몽주의를 반대했다.
왜냐하면, 감성과 정념 역시 이성과 마찬가지로 사람이라는 양태의 하나이므로, 이것은 무엇이 무엇을 통제하는 구조가 아니라 서로 합일하여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질적인 속성들이(현대적으로 풀어보자면 이성의 외부에 있는 타자들이) 어떻게 이성과 합일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에 대하여 스피노자는 사람에게 [코나투스]가 있고, 그것이 이성과 육체의 소욕을 합치시킨다고 한다.
즉, 이성이 육체의 소욕을 설득하여 이성에 부합하도록 움직이게 하기도 하고, 육체의 소욕이 이성을 설득하여 감성과 정념에 부합하도록 움직이게 하기도 한다는 것인데, 가령 배고픈 아이가 어른이 무심코 흘린 빵 한 봉지를 보고, 물건을 잃어버린 주인의 마음을 헤아린 이성이 육체의 소욕을 설득하여 빵 한 봉지를 주인에게 돌려주기도 하고, 배고픔을 느낀 육체의 소욕이 [저 사람은 이것 없이도 살 수도 있으니 먼저 스스로를 구제하라]고 이성을 설득하여 빵을 스스로 취하게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대놓고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사유와 행위의 작동원리가 위와 같다면, 당연히 특정한 생각이나 행위가 나오도록 환경을 조성해주면 사람이 코나투스에 의하여 그 환경이 유도한 생각이나 행위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환경으로서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무르익게 하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서로 협의하여 바람직하고 풍요롭게 공존할 것이라고 낙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예측대로 움직이지 않는 존재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이고, 똑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람은 그때그때마다 다른 반응을 보이기 일쑤다. 즉, 예측은 가능하지만 예측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이 사람이다.
아직 자유주의와 공화주의가 무르익지 않아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사실 사람의 속성상 그러한 지도원리가 완숙하게 무르익는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현재까지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가 스피노자의 작용원리대로 움직였다고 볼 만한 사례나 증거가 없다. 즉,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아직까지는 실패한 상태이고, 어쩌면 영원히 성공할 가능성이 없을 수도 있다.
억지로가 아니라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하자.
스피노자의 실패는 다른 데에 있지 않다. 그것은 근대의 언어로 하자면 데카르트의 정념에 대하여, 지금의 언어로 하자면 무의식, 사회적 무의식, 타자 등에 대하여(달리 말하면 사람의 감성과 정념) 너무 낭만적으로 바라본 데에 있다.
그래서 인문학은 회색지대에 서 있어야 한다. 즉, 인문학은 낭만이라는 필요조건 위에 서서 타자의 담론을 관조하여야 한다.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진정성 있는 관심이 오히려 낭만을 더욱 풍부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