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묻다 11
무의식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사람이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무의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발견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그러하다”라고 확신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의식만으로 이해될 수 없는 성격의 무의식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허망함에 닿았다.
오히려 프로이트와 프로이트의 연구를 차용한 철학자들의 생각과 같이, 근친상간의 금기라는 무의식적 욕망과 그것에 대한 통제와 순화가 의식세계를 구성하고 문화와 역사를 형성한 것이라면, 그것처럼 허망한 것이 없다.
왜냐하면, 어떠한 순화와 발전과정을 거쳤든, 결국 사람의 문화와 역사라는 것은 금지된 욕망을 원인으로 하여 형성되었다는 것이어서, 이는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을 [보기 싫지 않는 것]으로 눈속임한 꼴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유였다.
이러한 폐단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주체를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존재, 즉 무의식의 지배를 받아 형성된 꼭두각시로 형해화한 모순에 있고, 이러한 모순을 현학적으로 포장하여 스스로가 스스로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 것처럼 풀이한 철학사의 흐름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주체를 형해화한 모순은 그 자체로서도 문제였지만, 그 모순에 대한 반발이 더 큰 모순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다시 말해, 일리는 있으나 확신할 수 없는 가설들이 쏟아져 상쟁함으로써 인간과 인간 세계가 더 왜곡되어져 버렸고, 그러한 왜곡은 현실사회를 더욱더 완악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스스로를 확신할 수 없는 존재는 자신을 자존감 대신 상실감으로 채운다. 그리고 그렇게 길을 잃은 존재는 존재의 이유를 상실함에 따라 멋대로 스스로와 세상을 재단한다. 하여, 그러한 존재는 스스로로 하여금 바람직하지 못한 일탈이나 범죄에 이르게 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를 관조하는 관점은 여러 가지일 수 있지만, 그것을 역리로 사용하여 스스로를 해체하는 수순으로 몰고 가는 것이 과연 철학이나 인문학이 지향하여야 할 길인지를.
존재와 삶의 이유를 고양토록 하지 않은 채, 만연히 사람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존재로 풀이하는 것이 얼마나 절박한 현실을 방치하는, 안일하고 소모적이며, 무책임한 행동인 것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