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묻다 12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어거스틴은 알기 위해 믿고자 하였다.
즉, 감각 세계는 불확실한 세계, 그림자에 불과한 세계이기 때문에, 그러한 감각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그림자가 아닌 원형의 세계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과연 감각 세계를 떠난 본질로서의 세계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이냐는 공격을 받았다.
아퀴나스는 믿기 위해서 알고자 하였다.
즉, 감각 세계의 현상을 관찰하다 보면 그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본질 세계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그토록 자명하다는 본질 세계의 원칙에 어긋난 현상이 어찌하여 감각 세계에 존재하느냐는 공격을 받았다.
데카르트는 이성으로 [바라보는 자]와 [그가 바라보는 것들]의 본질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사람이 사유하여 인식한 존재]가 과연 [진실로 그러한 존재]인지를 어떻게 증명할 것이냐는 공격을 받았다.
스피노자는 [바라보는 자와 그가 바라보는 것들은 모두가 자연의 일부이고, 그래서 양자는 서로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자연이 표현하고자 한 형태대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하나로서 통일된 구조체라면 도대체 이 세계의 충돌은 무엇 때문에 발생하느냐는 공격을 받았다.
로크는 [모든 지식과 진리의 연원이 경험과 관찰에 있다]고 했다.
즉, 모든 존재는 본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저 경험하고 관찰하면 인식의 대상이 스스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과연 본유한 성질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사람마다 달리 인식하는 대상이 있느냐는 공격을 받았다.
버클리는 [지각되는 물질만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지각되지 않아도 존재하는 물질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어 스스로 모순에 빠졌다.
흄은 [경험적 인간상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경험과 관찰로 채득 된 지식 중에서 확실한 지식과 불확실한 지식을 구분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경험된 지식은 그저 습관적인 인식의 다발에 불과할 뿐, 그 무엇도 확실하다고 확신할 수가 없다는 사실에, 그는 회의론에 빠졌다.
칸트는 [사람에게서, 모든 존재는 판단된 것으로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나 판단된 것만 존재한다는 것은 독선일 뿐이라는, 그리고 사람마다 달리 판단하는 존재가 있다면 도대체 그 존재의 본질은 무엇이냐는 공격을 받았다.
헤겔은 [사람에게서, 모든 존재는 그 시대를 지배하는 시대의식이 평가한 대로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로 인하여, 그는 그의 시대에 절대정신이 완성되었다고 천명해 버림으로써 더 이상 철학과 인문학이 필요없다는, 학문의 종말을 선고하는 모순에 빠져버렸다.
맑스는 [사람에게서, 모든 존재는 사회적 맥락과 역사가 정의한 대로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사회적 맥락과 역사 역시 사람이 만든 것인데, 어떻게 사람이 스스로 만든 시스템에 종속될 뿐인 존재라고 할 수 있느냐는 공격을 받았다.
프로이트는 [사유의 주체는 투명하거나 통일성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과연 id나 super ego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작용을 하는지는 아직도 알 길이 없다.
니체는 [사람에게서, 모든 존재는 고유한 본질로서가 아니라 사람이 의욕한 의미(권력의지가 부여한 의미와 가치)로서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나 사람의 의욕은 유한하고 반복적인 것이어서, 결국 그는 신으로 하여금 일상의 회전목마에 치여 죽도록 한 채, 초인으로 하여금 일상의 회전목마를 초월하도록 독촉하였다.
그 결과 그의 논리는 도대체 이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느냐, 말하고자 하는 실체가 있기는 하냐는 공격을 받았다.
하이데거, 레비-스트로스, 라캉, 비트겐슈타인, 러셀 등은 [사람 이전에 이미 사람의 사유와 욕구를 형성하게끔 하는 틀이 있고, 사람은 그 틀에 따라 사유하고 행동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사람을 전제로 한 무의식이나 욕망 그리고 언어가 도대체 어떻게 사람 이전에 존재할 수 있느냐는 공격을 받았다.
흐름은 이러했다.
지금까지의 관찰에 의하면, 사람이 스스로 진리에 다다를 수 있는 주체로 상정된 이후, 주체를 비롯한 모든 것들이 불확실해졌고, 이러한 불확실성에 대한 변명이 이루어지면서 결국 진리 문제를 주체 외부의 생명 없는 것들에 의존하는 것으로 치부되기에 이르렀음을 알 수가 있다.
즉, 주체와 진리 개념의 불확실성이라는 문제가 결국은 주체 외부의 그 무엇(절대정신 - 헤겔, 생산관계 - 마르크스, 무의식 - 프로이트, 권력의지 - 니체, 언어구조 - 소쉬르, 야콥슨, 무의식 구조 - 레비 스트로스, 이데올로기 - 알튀세르, 지식권력과 생체 권력 - 푸코, 등등)을 유인함으로써, 보편적 진리의 거부 또는 불가능성으로 결말 맺게 된 것이다.
물음표가 붙었다.
[그것은 그들의 논리일 뿐, 도대체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냐?]라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살짝 비켜나간 역질문을 하고 싶다. [과연 우리는 사상가들의 위와 같은 사유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아왔던 것인가?]라고 말이다.
오늘날의 정체성 혼란과 반인간주의가 아무런 연고도 없이 대두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필자의 생각은 이러한 현상이 바로 위와 같은 철학적 흐름의 반영이라고 본다.
사람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할수록 좋다. 왜냐하면 사람과 세계의 이해를 더욱 풍부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은 사람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일 뿐, 사람과 세계 그 자체가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다. 종교적인 말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희망과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람은 떡만으로 살 수 없는 복잡한 존재인 탓이다.
말을 맺는다.
인문학은 인간의 사상과 문화에 대한 전반의 학문이다.
다름 아닌 인간을 위한 학문인 것이다.
그래서 인문학은 여러 물음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떻게 산다는 것]인지를 제시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파괴가 아닌 생산의 관점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