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 배고픈 돼지 앞에 선 인문학

인문학을 묻다 13

by 시인 손락천
사과는 언제나 사과였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척 보면 사과인 줄 알 뿐 다른 것과 헷갈리지 않는다.


그런데 대관절 우리는 어떻게 사과를 사과로 인식할 수 있는 걸까?

사람에게 사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관념이 있어서일까? 사과에게 그 자신을 그대로 인식하게끔 하는 특유의 성질이 있어서일까?



말이 많다.



데카르트라면 사람에게 이성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사과를 사과로 인식할 것이라고 말할 테다.


로크라면 사과는 사과로서의 본유적인 성질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사람에게 사과로 인식될 것이라고 말할 테다.


헤겔이라면 본질로서의 사과는 모르겠고, 다만 [사람이 있고, 사과가 있으며, 사람이 사과를 본 후, 사람이 사과를 먹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과로 인식하게 된다]고 말할 것이다.


칸트라면 본질로서의 사과는 알 수가 없고, 다만 [사람이 선험적 오성 형식과 판단 형식으로 사과를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그런 범주의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고 말할 테다.


이라면 사과가 사과일 것이라는 관념은 매우 불확실하지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과라고 믿고 사과를 사과로 인식할 것이라고 말할 테다.


구조주의 언어학자라면 본질로서의 사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속으로써 그러한 부류를 사과라 부르고, 또 그렇게 부른 대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할 테다.


구조주의 철학자라면 사과라는 것은 사람의 욕망이 스스로 외화 하여 사과를 그런 종류의 먹을거리로 순화한 욕망이라고 말할 테다.


맑스라면 사과를 역사적, 사회적 맥락 안에서 먹는 종류의 과일 중 하나로서 인식한 것이라고 말할 테다.


니체라면 사람이 먹어야겠다는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사과를 먹는 종류의 과일 중 하나로 포섭하여 인식한 것이라고 말할 테다.


스피노자라면 사람이든, 사과든, 그러한 것들은 모두 자연이 그러한 형태로 표현된 것일 뿐이어서, 본질적으로 하나의 자연 속에 속한 사람은 사과를 본질 그대로의 사과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할 테다.



배고픈 돼지에게서 배운다.



사람이 언제부터 사과를 먹게 되었는지, 그리고 언제부터 그것을 사과로 지칭하고, 또한 그렇게 인식하였는지를 알 수가 없다.


다만 사람이 사과를 먹게 되었고, 그래서 그것이 먹을 수 있는 열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즉, 생존본능이 사과에 대한 원초적인 지식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러한 생존본능에 터 잡은 지식이 사람을 생존하게 한 이후에, 비로소 사람이 사과를 낭만적으로 관조함으로써, 사과를 수색 대상, 채집 대상, 경작 대상, 요리 대상, 제례 대상, 장식 대상으로 심화하여 하나의 문화 및 문화적 지식을 형성한 것이다.



알게 된 것에 대한 낭만과 알 수 있는 것에 대한 모험, 그것이 인문학이다.



하여, 인문학이란 알게 된 것에 대한 낭만알 수 있는 것에 대한 모험을 다룬 사람의 이야기라고 함이 옳다. 즉, 인문학은 절대로 별세계의 머리 아픈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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