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묻다 15
나는 그를 진실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너는 그를 진실되지 않은 사람이라고 했다.
대관절 진실이란 무엇인가?
나는 보편적 가치에 따라 그를 인식하였던 것일까? 아니면 나의 필요에 따라 그를 인식하였던 것일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성향은 조금씩 다르지만,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그리고 칸트는 윤리학에 근거해서 사람의 내부에 있는 조절장치나 사회적 장치(데카르트식으로 말하면 송과선,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코나투스, 칸트식으로 말하면 판단력 비판)에 의하여 보편적으로 [그가 진실된 사람인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반면에 헤겔과 맑스 그리고 니체는 당대의 시대의식이나 권력의지에 의하여 [그가 진실된 사람인지의 여부]에 대하여 가치판단을 할 뿐, 말 그대로의 보편적 진실은 없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구조주의에 가까운 현대사상가일수록 진실은 순화된 욕망일 뿐, 진실이라는 본질은 존재하지도 않고, 설사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정체를 알 수가 없다고 할 것이다.
아무리 상대적이라 하더라도 스스로에게는 상대적일 수 없는 것이 진실이다.
진실은 칸트와 니체의 현란한 문장 속에서 발견되는데, 그 발견되는 지점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즉,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칸트의 순수 이성 및 실천 이성적 물음에 [나는 왜 무엇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왜 무엇을 알려고 하는가? 나는 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라는 니체의 권력의지(니체의 권력의지는 통속적 의미의 권력의지가 아니라 어느 향 방향으로 의욕하는 의지와 힘을 의미함)적 물음을 더하면, 진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자신에게서 확인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해, 진실은 우선적으로 자신에게 물은 여섯 가지의 질문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다만 그러한 의미의 진실이 사회적으로 평가되어 합의에 이르게 되면, 그때에 소위 말하는 보편적 진실이라는 관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결론은 [진실은 자신에게는 절대적인 것이고, 세계에게는 상대적인 것이되, 그 상대적인 것 역시 각자의 절대적 진실에 근거한다]는 것인 셈이다.
인문학은 타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나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된다.
하여, 우리의 인문학은 [사람을 위한다는 것은 결국 나를 위함에서 기인된다]는 평범한 원칙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인문학은 나를 위하여, 나의 소욕을 위하여 먼저 시작되어야 할 것이고, 그러한 진실 아래에서 시작되어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소욕을 위한 맺음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결국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는 황금률은 거짓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어떤 대접을 받을 존재인지, 어떤 대접을 받기를 원하는지를 알아야, 비로소 그러한 대접을 받을 수 있기를 의욕하여, 다른 이에게도 자신이 진실로 원하였던 그러한 대접을 하고, 결국은 자신이 그러한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