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컴, 강요 앞에 선 인문학

인문학을 묻다 16

by 시인 손락천
면도날이 있었다.



오컴은 14세기 프란체스코회 수사였고 논리학자였다.


그는 소위 보편 논쟁을 일으킨 유명론의 창시자로서, 그래서 근대철학을 태동하게 한 인물로서 인정받는다.


그는 "쓸데없이 많은 것을 가정해서는 안 된다"라는 중세의 경제원리, 즉 이른바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원리로 스콜라 철학자들이 실재론을 주창하기 위하여 고안하였던 불합리한 논증을 제거하는 데에 힘을 다하였다.


그 결과 오컴은 감각 세계에서는 보편자가 존재하지 않고, 신학적 세계에서는 보편자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가령 감각 세계의 경우, 인식 주체가 경험으로 채득 할 수 있는 아네모네, 국화, 튤립 등의 꽃은 개별자로서 존재하지만, 보편자로서의 꽃은 그러한 부류를 지칭하는 이름일 뿐, 꽃이라는 보편자는 존재하지 않고, 반면에 신학적 세계의 경우, 신은 인식 주체가 경험을 통하여 체득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감각 세계에서 신을 경험할 수 없다고 해서 신학적 세계에서조차 신이라는 보편자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는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채득 되는 합리적 세계인 감각 세계와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채득 할 수 없는 합리적이지 않은 신의 세계는 서로 다른 원리에서 설명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필요하지 않은 경우에까지 많은 것을 가정하면 안 된다.
보다 적은 수의 논리로 설명이 가능한 경우, 많은 수의 논리를 세우지 말라.



오컴의 면도날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어떤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하는 것은 사유의 낭비라는 것이다.


가령 제동장치가 고장 난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났다. 이럴 경우 사고의 원인은 그냥 차량이 노화되어 우연스럽게 제동장치가 고장 난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악의를 품은 사람이 모종의 의도를 품고 어느 날 고의적으로 표시 나지 않은 틈을 노려 제동장치를 망가트림으로써 사고를 유발한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주장이 있다면, 간단한 쪽을 선택하라는 것이 오컴의 면도날이다. 이와 같이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것은 필요하지 않은 가설을 잘라내 버린다는, 사유의 절약 원리인 셈이다.



설명은 간단할수록 좋다. 그러나 그것은 선호된 진실일 뿐, 진정한 진실이 아니다.



오컴은 쓸데없는 다수를 가정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면도날 이론을 고안하였고, 그래서 무언가를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중에서 가장 적은 수의 가정을 사용하여 설명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오컴의 생각, 즉 [가정은 가능한 적어야 하며, 피할 수만 있다면 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는 근․현대의 철학과 과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사실은 아직까지도 이를 사고와 사유의 계율처럼 받아들이는 사상가가 부지기수이다.


그러나 오컴의 면도날은 단지 "여러 가지 가설이 있는 경우 그중에서 어느 하나를 고를 때 사용하는 일종의 기호일 분이다. 즉, 우리가 오컴의 면도날로 어떤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서 어느 하나의 가설을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참이라고 할 아무런 보증이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컴의 면도날은 원인과 결과의 진위를 가르는 잣대가 아니라, 오류를 감수하면서 경제적으로 선택할 가설을 가르는 데에 쓰일 뿐인 잣대이다.



삶은 복잡하고, 그래서 삶이 남긴 흔적도 복잡할 수밖에 없다.



인문학이 사람과 삶에 대한 것인 이상, 인문학은 사람과 삶에 대하여 [이것은 이것이다], [이것은 이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이래야 한다]는 단정을 하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오컴의 면도날로 자르기에는 사람과 삶이 너무 복잡한 존재인 까닭이다.


그래서 인문학은 당위가 아니라 필요에 중점을 둔 학문이어야 한다. [이것은 이것이 아닐까], [이것은 이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이래야 하지 않을까]라며, 사람에게 오류를 감수한 단정이 아닌 따뜻한 가능성을 열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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