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17

그들에 대한 예의, 그리고 나에 대한 예의 2-5

by 시인 손락천

2-5


소송기록이 꽤나 두껍다.


온갖 진료내역과 수차례에 걸친 감정신청과 결과회신, 그리고 감정보완신청과 그 보완결과 회신이 기록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더구나 피해자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직접 1심 소송을 진행했던 상황이어서, 피해자의 주장 내용을 정리하기도 쉽지가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1심 재판부도 골머리가 썩었을 터다. 벌써 재판부터가 4년 가까이 진행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런데, 소송기록을 찬찬히 읽어보니 몇 가지의 문제점이 보였다.


물론 피해자에게 나쁜 감정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사람은 사람이고 소송은 소송이다. 형사사건이 아닌 이상, 그리고 민사사건에서 조정에 임하는 것이 아닌 이상, 법은 판단에 있어 눈물을 배제하고 증거와 논리에 따라 건조하게 판단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무수한 분규를 일으킨 모든 사람에게 형평성을 유지할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점심을 먹자말자 택시공제조합의 보상팀 부장을 불러 놓고 소송기록을 뒤적이고 있다.


“부장님. 일실수입(소극적인 손해 - 사고로 인하여 일을 하지 못함으로써 입은 간접적으로 발생한 소득금액 상당의 손해)의 기초로 삼은 피해자의 통계소득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요?”


“1심은 피해자가 문화, 예술 및 방송관련 전문가 남자 10년 이상 경력에 해당하는 월 평균 급여 4,245,148원의 소득을 가졌을 것이라고 보고, 이를 기초로 일실수입을 산정하였습니다.”


“이것은 피해자가 뚜렷한 직장이나 고정적인 소득을 얻어 온 것이 아니었기에, 피해자의 전공과 학력을 기준으로 통계소득을 적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통계소득을 적용하려면 사고 이전에 피해자에게 그와 비슷한 직종의 종사경력이나 소득경력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확인을 해보셨어요?”


“그래요? 듣고 보니 조금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럼 이 부분에 대한 증거신청을 해야겠네요.”


“무슨 말씀이세요? 피해자의 소득에 대한 자료가 전혀 없다는 것인가요? 보상을 하려면 협의를 하였을 텐데, 피해자가 그동안 소득증빙도 하지 않고 택시공제조합에 보상청구를 해왔다는 말입니까?”


“사무장님. 협의하고 말고 할 시간 자체가 없었어요. 1년 동안 계속 병원치료를 받다가 갑자기 소송을 제기한 경우이기 때문에 보상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꺼내보지도 못한 걸요.”


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택시공제조합도 그렇고 피해자도 그렇고 너무나 깜깜한 상태에서 서로에게 안 좋은 감정만을 가진 채로 상황을 악화시켜왔던 것 같다.


서로 대화를 하여야 유리하든 불리하든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보상근거와 자료를 취합하고 협상할 수가 있었을 텐데, 그냥 일방적으로 서로를 의심하기만 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통계소득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피해자에게 어떤 경력이 있었고, 그 경력기간 동안에 얼마의 소득이 있었으며, 그 소득의 변동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향후 그 소득이 얼마로 증가할 것인가에 대한 합리적인 예상이 가능하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합리적으로 예상된 소득의 규모가 구체적으로 위 통계소득에 접근할 만큼의 것이었느냐의 문제 역시 검토되었어야 합니다.”


“일단 관할 세무서에 피해자에 대한 과세정보를 제출하여 달라고 요청을 하도록 합시다.”


“피해자의 주장대로 여러 차례에 걸쳐 음악공연 등에 참가하였던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달리 그가 그 각 공연에서 얼마의 수입이 있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무작정 피해자를 문화, 예술 및 방송관련 전문가라고 보기에는 여러 모로 문제점이 많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1심이 인정한 통계소득에 상당하는 소득을 얻었다는 자료가 전혀 없다면, 거의 무명에 가까운 피해자에게 통계소득과 같은 수입이 있었으리라고 볼 이유가 없는 겁니다.”


“따라서 피해자의 일실수입은 그가 자신의 소득에 대한 객관적인 입증을 하지 못한 이상, 어디까지나 도시일용노임을 적용하여 산정하였어야 할 필요성이 있을 것이에요.”


택시공제조합의 보상팀 부장은 부지런히 내가 하는 말을 받아 적고 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우리의 변론 방향에 대해서 상부에 보고를 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1심에서 실시된 감정 중에서 비뇨기과 감정은 참으로 흥미로운데요. 사고로 인해서 발기부전이 발생하였다니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그 자체를 모르겠네요. 일단 발기부전의 원인에 대해서 다투어보도록 하지요.”


“다만 이 부분은 감정보완을 신청하는 방식으로는 하지 않고, 주장으로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괜히 비뇨기과에 감정보완신청을 해봐야 그들은 병증의 원인이 교통사고였다고 단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인이 아니었다고 단정하지도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차라리 이런 부분은 논문 등을 인용해서 발기부전의 일반적인 원인을 제시하면서, 사고가 그 원인이 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어필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 부분은 신경정신과에 감정보완을 촉탁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발기부전이 심리적인 현상이라면 이미 신경정신과의 장해에 포함된 병증이어서, 이를 따로 일실수입이나 위자료 산정에 고려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피해자는 발기부전으로 인한 일실수입을 주장하고 있고, 비록 1심은 이를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결국에는 발기부전을 위자료 산정에 그것을 고려하였으니, 항소심에서 피해자의 항소와 1심의 판결을 양면적으로 공격하려면, 어떻게든 발기부전이 교통사고와 관련이 없다고 하거나 이미 신경정신과적인 장해에 포함된 것이라고 주장하여야 할 것이니까요.”


택시공제조합의 보상팀 부장이 내 말을 듣고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겠지요. 일단 서면으로 주장하는 것과 신경정신과적 감정보완신청을 하는 것으로 양면적인 진행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의학 논문에 대해서는 사무장님께서 한 번 알아봐 주시고, 감정보완과 관련하여서는 일단 촉탁이 되고 나면 저희 쪽에서 감정의사를 접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피곤함을 느꼈다.


언제나 느끼는 일이지만 글을 쓰는 것보다 사람을 대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일방적인 작업이 아니라 상호적인 의견 교감을 하여야 하는 탓이다.


“그리고 신경정신과 감정 부분인데요.”


“가벼운 접촉사고로 인하여 노동능력이 24%나 상실되는 한시적인 장해를 입었다니 정말로 할 말이 없네요.”


“흔히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환자가 주장하는 제반증상이 사고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꾀병이나 보상성 신경증 또는 기왕증에 속한 것인지를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하는데, 이 사건의 경우에서와 같이 유독 피해자만이 가벼운 접촉사고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여 전혀 통상적이지 않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을 입은 것이라면, 그것은 사고로 인한 증상이 아니라 그 자신이 가지고 있던 내부적인 기왕증이나 기질에 의하여 나타난 특수한 증상이라고 봐야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인과관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통상적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나타나는 증상은 크게 4가지입니다. 첫째, 꿈이나 반복되는 생각을 통하여 외상이 재경험 되는 것, 둘째, 외상과 연관되는 상황을 피하려고 하거나 무감각해지는 것, 셋째, 자율신경계가 過(과)각성되어 쉽게 놀라고 집중력 저하, 수면 장애, 짜증 증가 등이 발생하는 것, 넷째, 간혹 공황 발작과 같은 심한 불안을 느끼거나 착각이나 환각 등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심의 감정서를 보면 피해자의 증상은 불안장애, 강박장애, 이인장애, 건강염려증, 정서장애, 망상장애 등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신경정신과적 증상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피해자의 경우에는 신체감정결과에 나타난 신경정신과적 증상 모두가 위 진단의 병으로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질환에 기인하였던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일단 신경정신과에 발기부전의 원인에 대해서 의견을 묻고, 아울러 피해자의 증상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구분되는 특징이 있는지에 대하여 묻는 감정보완을 요구한 다음, 접촉사고와 상당인과관계가 없다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노동능력상실율이 접촉사고와의 인과관계 범위 내에서 적절하게 제한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형외과 감정 부분 역시, 접촉사고의 규모에 비하여 볼 때 그 결과가 너무 중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1차 감정과 2차 감정의 결과가 서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1차 감정에서는 경추부의 염증만 발견되었는데, 1차 감정에서 갑자기 왼쪽 견관절 상극건의 부분파열이 발견된 것입니다.”


“사고가 발생하고 한참 뒤에 1차 감정이, 그리고 1차 감정을 한 후 한참 뒤에 2차 감정이 이루어진 점에서 보면, 경추부의 염증은 몰라도, 상극건의 부분파열은 도저히 접촉사고로 인한 것이라고 보기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과실비율에 좀 문제가 있고요. 왜냐하면 전방주시의무의 태만을 두고 10%의 책임제한만을 하였다는 것이 이례적이기 때문입니다.”


“아참! 치료비 역시 문제입니다.”


“피해자는 상당히 오래 동안 꾸준하게 치료를 받아 왔는데, 도대체 어떤 내역으로 치료를 받았는지가 불분명합니다.”


“온전히 교통사고와 관련한 치료비만 청구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전혀 다른 질병으로 치료를 받은 비용까지 함께 청구한 것인지를 파악해보아야 할 것이에요. 이 부분은 우리가 항소심 법원을 통하여 병원에게는 진료비내역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게는 진료급여의 상세내역을 제출해달라는 문서송부촉탁신청을 하겠습니다.”


사실 변론 방향에 대해서는 의뢰인과 상의할 일이 별로 없다.


구체적인 사건의 경위나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의뢰인을 부른 것이 아닌 이상, 상의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변론 방향을 설명하기 위해서 부르는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의뢰인을 불러 상의하는 절차를 밟는 것은, 간혹 의뢰인에게 전혀 고지하지 않은 채 변론을 진행하다가 재판 결과가 나쁠 경우, 의뢰인으로부터 심각한 클레임을 당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호사 사무실에서는 싫든 좋든 변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무조건 의뢰인을 불러 설명을 하고 동의를 받아 재판을 준비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보통이다.


“네. 설명 잘 들었습니다. 그렇게 진행하시면 되겠네요.”


“우리가 협조할 부분은 충분하게 협조할 테니, 증거신청이나 회신결과가 있으면, 그때마다 연락주세요. 잘 좀 처리해 주시길 부탁드려요.”


“예. 소송을 맡은 이상 최선을 다해야지요. 일단 변론이 진행되는 경과를 봐가면서 연락을 드리도록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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