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어디에도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27

진실, 어디에도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3-4

by 시인 손락천

3-4

어느 계절이든 처음이 있고, 절정이 있고, 끝물이 있다.


2012년의 봄도 그랬다.


나는 계절 중에서는 봄을, 봄의 기간 중에서는 갓 시작한 봄을 좋아한다. 그러나 생명의 준동을 알린 꽃과 연두색 잎새의 향연은 그리 길지 않다. 은빛 휘날리는 생명의 향연은 쉬이 지고, 그 진했던 생명의 내음은 조금씩 우거진 녹음에 가려진다.


생명이 주는 강렬한 희망의 빛이 사그라지는 것. 그것은 하나의 삶이 끝나고 다시 하나의 삶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다.


마치 언제나처럼 들뜬 마음일 수 없이 다시 여상한 일상으로 회귀하고야 마는 것이 삶이고, 또 그래야만 삶이 연속적으로 유지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서브프라임 사건은 치열한 태동의 봄을 지나 패배라는 쓴 꽃을 피우고 진 채 우리에게 하나의 끝과 또 하나의 시작을 알렸다.


변론은 변호사가 하지만 판단은 판사가 한다. 그리고 그러하기에 변호사는 판결에 불복할 수는 있지만, 판결을 폄하할 수가 없다.


그러나 소송의 수행 담당자나 의뢰인인 당사자 본인은 변호사가 아니기에 그런 룰에 매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얼마든지 판결을 폄하할 수가 있고, 강도 높게 비난할 수가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아무리 부조리가 판을 치고 있을지언정 공적인 대상에 대한 개개인의 그러한 폄하와 비난에 대해서는 굳이 그것을 가로막으려 하지 않고 폭넓게 양해한다.


“개코같은. 사기면 사기지 경영상의 판단은 뭐란 말입니까!”


일호의 일성이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재판부는 처음의 임대차계약은 한국철도공사가 서브프라임을 기망하여 체결한 것이고, 그것은 불법행위가 맞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후의 합의는 한국철도공사가 KTX의 정차 폐지 사실과 관련하여 서브프라임을 기망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단정할만한 증거가 없고, 단지 서브프라임이 경영적인 판단을 하여 합의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결하였다.


즉, 비록 판결서의 내용은 길었지만, 재판부는 그러한 이유로 일방적으로 한국철도공사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합의가 없었다면 철도공사가 모든 책임을 졌어야 하지만, 합의를 하였기 때문에 서브프라임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이상한 논리이지요.”


“합의가 무효 또는 취소할 수 있는 법률행위를 유효한 것으로 전환할 수는 있는 것은 맞지만, 이 사건은 달리 볼 충분한 이유가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에서의 합의는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이라는 측면이 강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점은 불법행위가 무마될 정도로 용인할만한 보상이 합의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가 면밀하게 검토되었어야 하는데, 그러한 검토 없이 그것을 그냥 경영상의 판단이라고 뭉개버리고 말았으니. 분명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내 말을 듣던 일호가 나에게 손을 들어 잠시 말을 끊었고, 곧이어 단호하게 말했다.


“뭐 나는 그런 복잡한 말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최소한! 경영상의 판단은 아니지요! 어느 미친놈이 KTX 정차가 폐지될지도 모르는데, 마냥 KTX가 계속 정차할 것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한 채 수익분석을 해서 합의를 한다는 말입니까! 그것도 임차인이. 무려 40억원 이상을! 잔여 공사비까지 합치면 60억원 이상을 임차목적물에 쏟아 붙는 손해를 입으면서 말입니다!”


“저는 KTX 정차가 폐지될 예정이었다면 결코 그런 허황된 내용으로 합의를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KTX가 어느 날 갑자기 정차 폐지가 될 수 있는 겁니까? 합의를 하고 두 달 뒤에 KTX 정차가 폐지되었다면, 그놈들은 벌써 진작에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게지요. 그래 놓고도 우리가 KTX가 정차할 것을 고려하여 수지분석하는 것을 웃으며 지켜보았을 테고, 결국은 합의를 유도한 것이겠지요.”


서브프라임이 한국철도공사와 문제의 합의를 한 것이 2010년 11월 29일이다. 그리고 KTX의 구미역사 정차 폐지가 확정된 것이 그로부터 두 달 뒤였다.


분명히 냄새가 나는 상황이다. 표정과 말 모두에서 쏟아져 나오는 분노. 분명히 언짢음을 깊이 감추던 평소의 일호와는 달랐다. 그리고 이 상황은 일호가 그렇게 다른 모습을 보이는 데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경영상 판단은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경영상 판단을 한 경영자 본인과 회사가 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지표, 즉 현출 가능한 모든 지표가 현출 된 상황에서 경영상 판단이 이루어졌을 때에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즉, 이해관계가 있는 누군가가 회사의 명운이 달린 경영적인 판단과 관련하여 객관적으로 이미 알고 있었거나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지표를 고의적으로 숨기거나 알려주지 않음으로써 잘못된 경영상 판단을 유도한 것이라면 분명 불법행위의 여지가 있는 것이지요.”


“세상천지의 어떤 경영자도 회사를 망하게 할 목적으로 일부러 허황된 내용의 합의를 할 이유가 없을 테지요. 그리고 그러한 합의를 마치 정상적인 경영상 판단인 것처럼 치부하여 손해를 발생시킨 상대방에게 면죄부를 주어서도 안 될 일이고요.”


“일단 생각 좀 해봅시다.”


“무엇이 정상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진 경영상 판단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자료가 될지를 말입니다. 경영상 판단이라는 것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이지만, 매우 주관적인 가치판단에 대한 것이어서 감정과 정황만으로는 그것에 대한 재판부의 가치판단을 무너뜨릴 수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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