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봄, 강남구 도산대로 도산기념사업회 건물 지하 강당으로 내려가는 계단 길, 벽에 걸려있는 사진 한 장이 우연히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사진은 이혜련 여사와 이강 선생이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그 사진 한 장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며 도산 안창호와 얽힌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 같았다.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한다.
1963년 박정희 시대. 이혜련 여사가 막내아들 필영을 데리고 60년 만에 모국을 방문했다. 도산 안창호 탄신 85주년이고 서거 25주기가 되는 해였다. 이혜련 여사의 나이는 79세, 필영의 나이는 37세. 필영은 단 한 번도 아버지 도산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자란 막내아들이었다.
이혜련 여사와 필영은 도산이 안치된 망우리 묘소부터 찾았다. 혜련은 묘소 앞에서 잠시 회상에 잠겼다. 1925년 도산은 미주를 방문한 뒤 1926년 4월 시드니를 거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혜련이 도산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때 잠깐이었다. 혜련은 다시 떠나는 도산을 샌프란시스코 항까지 배웅했었다. 벌써 38년 전의 일이다. 도산은 1919년 4월 미주를 떠나 내내 상해 임시정부 안팎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그 과정은 매우 험난했다.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이 없는 상황이었다.
망우리 도산 묘소에서 한강이 보였다. 혜련은 넋두리처럼 감회를 피력했다. “세상은 변했어도 한강은 그대로 흐르고 있구나.”
혜련은 필영과 함께 이강을 찾았다. 이강은 도산과 동갑이며, 평양 지기이자 뜻을 함께한 평생 동지였다. 이강은 1946년 귀국 이후 평안남도 도민회 부회장과 용강군민회 회장을 지내며 고향을 그리다가, 1948년에 계명의숙을 창립하여 이사장을 지내고 남산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면서 흥사단에서 활동하였다.
혜련을 본 이강은 말했다. “내가 혜련을 만나려고 죽지 못했나 보오.”
혜련과 이강은 미주 리버사이드 오렌지농장과 공립협회에서 동고동락하다가 1907년에 헤어졌으니 56년 만의 만남이었다. 혜련은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반가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말했다. “강이 오라버니를 이렇게 뵈니 필영 아버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이 만나 주고받으면서 시작된 이야기, 바로 도산 안창호 이야기였다.
이강은 생각했다. ‘내 나이 85세. 참 길게 살았어. 질풍노도의 시기에 국가를 상실하고 국가를 되찾겠다고 살아온 인생. 도산과 같은 꿈을 꾸며 도산의 의지에 의기투합했었지. 도산은 바로 나이고, 나는 또 도산이었어. 그런데 내가 이렇게 도산보다 25년을 더 살고 있구나. 어쩌면 도산이 나한테 부탁한 일인지도 몰라. ‘필영이를 보거든 내 이야기를 좀 전해주게!’ 하는 것만 같군. 이건 나의 마지막 사명인 거야. 내 사후에 이 나라가 가는 길은 필영이 세대가 책임질 일이 되겠지.’
세 사람의 만남을 끝으로 이강은 1964년 10월 13일, 86세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5년 후인 1969년 4월 21일, 이혜련은 86세 생일날 숨을 거두었다.
사람은 누구나 시대를 품고 태어난다. 그것이 숙명이다.
안창호가 태어난 시기, 1878년 전후 동아시아의 사정은 이러했다.
1636년 조선을 능멸했던 병자호란. 그로부터 한국에 대해 종주권을 행사해 오던 청나라는 1840년과 1856년 두 차례에 걸쳐 영국과 아편전쟁을 치렀고 패전했다. 아편전쟁의 패배로 인해 중국 땅은 반 식민지화되었다. 청나라는 군사적 자강과 경제적 부강을 목표로 양무운동을 일으켰으나, 대외위기에서 군사적 승리를 한 번도 거두지 못했다. 1874년 대만정벌로 빚어진 일본과의 전쟁, 1884년 베트남을 두고 벌어진 프랑스와의 전쟁, 1894년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모두 패전했다. 청나라는 망해가고 있었다.
러시아는 청나라를 압박하여 1689년 네르친스크조약을 체결하고 흑룡강 연안을 차지했다. 러시아는 청나라의 제2차 아편전쟁의 혼란을 틈타 1858년 아이훈조약과 1860년 북경조약으로 연해주를 차지했다. 연해주는 러시아어로 프리모르스키라고 하며 이는 우수리강, 아무르강, 동해로 둘러싸인 지역을 말한다. 연해주 남쪽은 함경북도와 접해있다. 러시아는 남쪽 접경지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에 1873년 군항을 건설하고 태평양으로 남하 정책을 시도하면서 한국과 일본을 넘보고 있었다.
일본은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등장해서 에도막부를 설치하고 1867년까지 일본을 지배했다. 에도막부는 열강의 개항요구에 대응하여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며 쇠락을 거듭하다가 1868년 메이지 천황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이른바 메이지 유신 세력은 천황(덴노) 중심으로 중앙집권제를 복원하고 입헌제 채택과 산업근대화를 추진하면서 막강해졌다. 메이지 덴노와 그 세력은 서구 열강에게 당한 강제 개항 경험을 대만과 조선 침략에 그대로 적용했다. 이들은 1874년 대만사변을 일으켜 대만을 정벌했다. 그리고이듬해 1875년 5월에는 군함 세 척을 부산, 원산, 인천에 파견하여 함포 사격 등으로 무력시위를 도발하고 돌아갔다가, 8월에 다시 운요호를 앞세워 강화도 침략을 감행했다.
우리나라 대원군은 1863년 메이지유신보다 5년이나 앞서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왕조 권력 강화에만 집중하고 근대적 개혁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대원군은 프랑스와 미국을 상대로 무력 충돌을 유발했다. 이것이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다. 1873년 대원군은 백성의 신뢰를 잃고 실각했다. 이로부터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고종과 왕비 민씨 세력 역시 이렇다 할 근대화 정책을 갖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1875년 8월 20일 일본 군함 운요호의 침략을 받았다. 일본은 양민을 죽이고 방화와 약탈을 감행했으며, 그 책임을 조선에 뒤집어씌웠다. 고종은 이에 굴복하고 1876년 2월 27일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외교 통상권 및 광산, 철도 등 각종 근대적 개발 사업권을 내주면서 일본에 조선 침략의 발판을 놓아주고 말았다.
1878 무인년 11월 9일. 안창호는 평안남도 강서군 대동강 하류에 있는 도롱섬에서 아버지 안교진과 어머니 황몽은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나라의 운명이 일본의 힘에 기울고 있을 때 태어난 것이다. 안창호에게는 형 치호와 치용 그리고 여동생 신호가 있었다. 아버지는 안창호가 7살 때 돌아가셨다. 가엽게도 여동생 신호는 1884년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에 태어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안창호네는 할아버지 슬하에서 농사를 지으며 근근이 살았다.
안창호는 청소년기에 서당에서 한문과 유학공부를 하였고, 당시 3년 선배이자 신지식인이었던 필대은을 만나 ‘치국평천하’의 역사에 눈을 뜬다. 조선왕조의 뿌리가 봉건적 유습과 쇄국주의로 마구 흔들릴 때였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고향을 떠나 피난해야 했을 때, 도산 안창호는 서울로 상경하여 구세학당에 입학한다. 이때 만난 친구 김필순과 독립협회에 가입하며 변혁기 역사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당시 유길준의 『서유견문』과 서재필의 『독립신문』은 안창호 독립운동의 길잡이였다.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서 많은 선각적 지식인들과 교유하였고, 특히 만민공동회 평양지부를 결성하면서 평생지기들을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