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나부터 힘을 기르자 #1/10
1화. 서당 선배 필대은
1화. 서당 선배 필대은
1894년. 부패와 무능과 권력다툼으로 나라의 기강은 무너져 있었고, 이를 개혁하고자 청년들이 주도했던 갑신정변이 무위로 끝난 지도 어느새 10년이 지나고 있었다. 안창호의 나이도 어느덧 만16세. 질풍노도의 시기가 찾아왔다. 소년의 티를 벗고 청년으로 발돋움하는 시기, 관계성이 확장되고 동시에 자아가 확장되는 시기이다. 이때 누구를 만나 어떤 대화를 나누고 어떤 변화를 추구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기도 한다.
안창호는 나랏일이 걱정되었다. ‘고구려 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은 만주와 요동을 차지하고 용맹을 떨쳤건만, 지금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힘이 없을까? 왜 이렇게 힘없이 망해가고 있는 것일까? 앞으로 어떻게 될까?’
1894년 2월 15일,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도와 농민군들이 ‘보국안민, 폐정개혁’의 기치를 내 걸고 궐기했다는 소식이 평양까지 들려왔다. 동학은 ‘후천개벽과 만민평등의 지상천국 건설’이라는 보국안민의 이념을 종교화한, 몰락 양반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였다. 농민혁명군은 봉건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규탄했고, 일본의 침략과 간섭에 맞섰다. 농민혁명군의 대장은 전봉준이었다. 전봉준은 손화중, 김개남 등과 함께 동학의 종교조직과 결합하여 4천여 명의 농민군을 조직하고, 탐관오리의 숙청과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궐기한다는 창의문을 발표했다. 농민전쟁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승기를 잡은 농민혁명군은 전라, 경상, 충청, 경기도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와 정부를 위협했다. 정부는 농민군을 제압할 능력이 없었다. 전주성이 함락되자 이에 놀란 민씨 정권은 자력으로 농민군과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4월 29일,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일본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일본과 청나라는 유사시 조선에 군사를 파병할 경우 서로 통보하기로 톈진조약을 체결한 바 있었다. 청나라군 개입 소식을 듣게 된 일본은 이를 기회 삼아 조선에 군대를 파병했다. 조선 정부는 동학농민군 전쟁이 진정되었으니 두 나라에 철병할 것을 요청했으나, 일본은 조선의 내정개혁을 구실로 물러나지 않았고, 청나라를 상대로 계속해서 전쟁을 도발했다. 결국, 7월 23일 일본군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한 뒤, 조선군대를 무장시켜 아산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함대를 기습 공격했다. 이것이 청일전쟁의 서막이었다. 한편,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삼례에서 재봉기를 시도하였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무기와 그 화력을 견디지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평양성까지 밀고 올라올 기세였다.
이러한 정국 속에서, 안창호는 어느 날 능라도가 보이는 대동강 변에 앉아 무심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라에 힘이 없다. 큰일이다.’ 때마침 등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서당에서 사귄 필대은 선배였다. 안창호는 필대은을 무척 따랐다. 호기심이 많은 안창호는 필대은을 통해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배우고 많은 깨우침을 얻었다. 필대은은 이번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이기고 있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청나라가 명장 이홍장과 등세창을 앞세워 현대화된 북양함대를 이끌고 위세를 떨쳤지만, 청나라 해군은 황해도 앞바다로 쫓기고 있다고 했다. 일본군의 전술과 무기가 청나라보다 더 앞섰다는 것이다. 안창호는 청나라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일본이 궁금했다.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요?” 안창호가 필대은에게 물었다.
필대은이 말했다. “일본도 오랫동안 쇼군이 지배하는 봉건 체제로 유지되었어. 세력 다툼은 당연지사. 12세기 초 가마쿠라 막부에서 14세기 무로마치 막부 등이 지배하다가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를 통일하면서 센고쿠 시대가 끝이 난 거야.”
안창호가 필대은의 말을 끊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사람?”
“맞아, 1592년 임진왜란은 바로 자기네들 전국시대의 끝을 알리면서 조선 침략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지. 일본 수군은 이순신 장군을 당해내지 못했어. 1598년 8월에 도요토미는 죽게 돼.”
“아, 역시 불멸의 이순신 장군...! 계속해 주세요.” 안창호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했다.
“도요토미가 죽자 일본 수군은 철수하기 시작했고 왜란은 끝이 나지. 사실 양측은 모두 피해가 어마어마했어. 어쨌든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등장해서 센고쿠 시대를 마감하고, 1603년 동경(에도)에 막부를 설치하여 무인 정권 시대를 새로 열게 되었지.” 필대은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에도막부가 지배했던 시대도 끝이 있었겠지요?” 안창호가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물었다. 필대은은 안창호가 흥미로워하는 것을 보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전수하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물론이지. 1542년 포르투갈 함대가 선교사를 앞장세워 화승총과 카스텔라(빵)를 가지고 처음 나가사키에 접근했을 때만 해도 일본은 쇄국정책을 썼어. 외국인과의 교류를 금지했고 천주교 박해를 시작한 거야. 하지만 천주교 신자가 꾸준히 늘어나는 바람에 결국 30년 후에는 포르투갈과 교역을 하긴 했지. 그러다 1636년 네덜란드 무역 상선이 설탕을 가득 싣고 나가사키에 도착했을 때, 일본은 데지마라는 인공섬을 조성해서 외국인들을 격리 조치했었거든. 그러면서도 이들이 싣고 온 설탕에 반했던지 네덜란드와 무역 교류를 했어. 나가사키 일본인은 빵에 설탕을 넣어 단맛의 카스텔라를 만들어 먹기 시작했고 그 맛의 효과가 엄청났던 가봐. 경제발전과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부유한 소상공인 계급이 등장했지.”
안창호가 말했다. “아주 흥미로워요. 그런데 일본은 평화적인 교역만 한 것이 아니라 군함으로 강화도를 침략해서 우리나라와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잖아요. 언제부터 막강한 군함이 만들어지게 된 건가요?”
필대은은 일전에 자신이 이야기해 준 역사적 사건들을 다 기억하고 있는 안창호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하, 그래. 군함이 쳐들어오면 정말 무섭지. 미국이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와 연합하여 무기를 실은 군함으로 1853년에 시모노세키를 공격했어. 조슈 번의 무사들이 미국 페리 함대에 대응했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지. 에도막부는 이 4개국과 불평등 통상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계기로 에도막부의 쇄국 체제는 유명무실하게 되었어. 그로부터 10여 년간 불평등한 외교 관계, 외국 상품 유입으로 인한 물가 상승 등으로 백성이 살기 어려워졌지. 그래서 지방의 하급 무사들이 주도해 막부 타도를 들고나온 거야. 이들은 메이지 천황(덴노) 중심의 새 정부 수립을 외쳤지. ‘봉건제 폐지,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제도 수립, 조세제도 개혁, 근대적 산업 육성, 신분 차별 폐지, 근대 교육 시행, 근대 문물 수용, 징병제실시, 근대적 군대 양성 등등.’ 에도막부는 1868년 마침내 목인(무스히토) 세력에 권력을 이양했어. 메이지 덴노 시대가 시작된 거야. 이걸 메이지 유신이라고 해.”
안창호가 물었다. “메이지 유신 세력은 청년 무사들이겠지요? 우리나라에도 혁명을 꿈꾸는 청년들이 있었나요?”
필대은은 안창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창호는 청년이다. 혁명가로 성장할지 모른다.’ 필대은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숨죽이고 말했다. “암, 청년혁명가들이 있었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 이들은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를 꿈꾸며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지. 그런데 1882년에 대원군을 옹호하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씨 정권은 청나라를 끌어들였거든. 청나라는 음흉하게도 재집권하게 된 대원군을 자기네 군함에 가두고 노골적으로 식민통치를 하려고 했지. 그래서 청년들이 1884년에 청나라 반대를 외치면서 정변을 일으켰던 거야.”
안창호가 눈을 깜빡이며 재촉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일본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죠.”
“정변을 일으킨 청년들은 모두 붙잡히고 그들이 시도한 개혁조치들은 3일 만에 모두 수포로 돌아갔어. 청나라 세상이 되는가 싶더니 일본이 개입해서 피해보상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벌였지. 결국, 정부는 일본과 한성조약을 체결했어. 일본은 또 청나라와 텐진 조약을 체결해서 조선을 놓고 서로 견제하기로 했고.... 자주 부강은 개화당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힘을 기르고 또 합해야 할 대과업이지.” 필대은은 혀를 차면서 말했다.
안창호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군요.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네요. 우리나라가 힘이 없는 이유는 뭘까요? 이번엔 농민봉기조차 다스릴 힘이 없어 청나라를 다시 끌어들이고, 그래서 일본은 우리 땅에 군사들을 상륙시키고....”
“아니, 더 큰 위험이 우리나라에 위협을 가해 오고 있어.” 필대은은 약간 흥분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에?”
“메이지 유신 세력은 한반도 침략을 통해 대륙으로 뻗어 갈 계획을 세우고 있어. 이것이 정한론이고 탈아론이야. 고부에서 농민들이 오죽하면 봉기했을까! 관료는 부패하고, 조정은 여전히 외세를 끌어들이고,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은 무서운 나라군요. 우리나라는 강화도 불평등 조약 이래로 18년이나 허송세월을 한 셈이네요.” 안창호는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침묵하던 필대은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니까 나라가 강해지려면 백성들이 앞날을 내다볼 줄 알아야 해. 서당 공부만 해서는 부족해. 일본 메이지 유신 세력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나라도 인재들을 서구나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던가 해서 근대 신학문을 배우게 해야 하는 거야.”
안창호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라에 힘이 없다. 힘을 길러야 한다.”
9월이 되자, 청군과 일본군은 평양에서 격전을 벌였다. 평양 시내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청군은 9월 16일 밤 평양을 포기하고 후퇴했다.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는 1895년 4월 17일,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항 아카마 신궁 옆 춘범루(春汎樓)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시모노세키조약의 내용은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하라는 첫째 조항을 비롯하여 요동반도와 대만과 팽호제도를 할양하고 2억 량의 배상금을 지불하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조약의 내용이 알려지자 러시아, 프랑스, 독일 3국이 무력시위로 간섭에 나섰다. 그 결과 청나라는 일본에 추가배상금을 지불하고 요동반도를 지켰으나, 러시아에게 여순과 대련을, 프랑스에게 광주만을 독일에게 교주만의 조차를 허용하였다. 1, 2차 아편전쟁 이후 홍콩과 구룡반도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막는다는 구실로 산동반도 웨이하이를 조차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한반도를 청나라로부터 떼어내어 일본의 세력권에 종속시킴으로써 대륙침략의 기반을 확고히 다질 수 있게 되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