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나부터 힘을 기르자 #9/10

9화. 세계 통일연합기관 설계

by 은명

9화. 세계 통일연합기관 설계



안창호는 오클랜드로 대피한 공립협회 회관에서 임치정, 정재관, 임준기, 이강, 이대위, 김성무 등과 이론 무장을 위한 동맹 학습에 돌입했다. 근대국가 형성과 ‘사회진화설’, ‘사회계약설’, ‘신민설’ 등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학습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의 사상적 배경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학습했다. 이들은 봉건왕조 체제를 탈피하여 신국가 체제로 가는 것이 우리의 국권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결론짓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공화국 수립에 집중했다.

이들은 또한 을사늑약 이후의 한국 사정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을 입수하여 정독했다. 양계초(량치차오, 1873~1929)는 1897년 독립협회 시기에 조선 언론에 소개된 바 있었다. 그는 조선이 이미 멸망해 가고 있음을 지적했고, 중국이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양계초는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처럼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될 것으로 예측했다. 그는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진화의 필연적 결과로 보고, 경쟁은 진화의 동력이며 민족국가는 경쟁 주체가 진화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라고 보았다. 따라서 중국의 최대과제는 유기체적으로 통일된 국가 즉, 강력한 입헌군주제가 답이라고 판단했다. 양계초는 블룬칠리(J.K.Bluntschli)의 국가론을 채택했다. 양계초는 자유 민권을 분열 또는 분산성으로 파악하고 이를 경계하여 입헌군주제에 공속감(共屬感)을 갖는 사람이 신민이라고 정의 내렸다. 그에 따르면 신민은 각성이라는 조건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군주독재나 식민 지배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양계초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여섯 유형의 방관자를 꼬집으며 중국인을 질타했다.


양계초의 신민설에 대해 안창호는 생각을 달리하고 있었다. 안창호가 보기에, 을사늑약 이후 우리나라 국민은 황제를 잃었고 국민은 일본의 노예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우리나라 국민 모두 주인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 봉건적 신분에 속하는 사농공상뿐만 아니라 노예, 여성, 아동 등 사회 소외 계층도 모두가 자유민이며 평등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 안창호는 자유주의의 기본 가치를 미래의 보편적 가치로 판단하고 모든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고 생각했다. 안창호의 근대국가는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며 직업이나 기호(嗜好) 선택의 자유,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는 평등사회였다. 이는 자유 민권에 바탕을 둔 자유공화국을 말한다. 그가 생각한 인간의 참된 행복의 원천은 바로 자유였다. 자유의 권한은 개인의 자각과 혁신을 전제로 하며, 동시에 타인의 행복을 존중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를 확립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안창호의 생각은 루소의 『민약론』과 밀의 『자유론』에서 영향을 받았다. 루소는 『민약론』에서 ‘정치, 경제의 평등이 있어야 개인의 자유가 가능하다.’라고 했다. 자아혁신과 신성단결. 안창호는 국권을 우선시하는 단체의 결합을 탈피하고, 자유 민권 정신으로 무장한 새로운 인민의 단결, 즉 신단체를 결성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공립협회 동맹 학습과 공론에서 얻은 결론이었다.


1906년 12월, 공립협회가 안정되자 안창호는 서둘러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안창호는 공립협회 핵심들과 근대국가로 가는 국권 회복의 청사진을 짰다. 이들은 러일전쟁과 을사늑약의 여파로 한인들이 북만주와 러시아로 많이 이주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북만주에는 빈곤 농민층이 이주하여 조선족을 형성했다면, 러시아는 자본력이 있는 농업과 상업 종사자 그리고 관리 출신들이 많았다. 특히 연해주에는 1860년대부터 함경북도 이주 농민들이 해안가 등지에서 움막을 짓고 개척리를 형성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873년 블라디보스토크 군항 건설과 1891년 시베리아횡단철도 착공 전후로 인구가 급증하면서 농업과 상업에서 자본가가 많아졌다. 1890년대 이후로 한민족(카레이스키)은 연해주와 시베리아 인구의 20%를 차지했다.

러일전쟁 때 친러내각의 대한제국은 군대를 파견하여 두만강 일대 국경을 사수하면서 러시아를 도왔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우리나라는 강제로 을사늑약을 당했다. 외교권을 빼앗기자 곳곳에서 의병들이 궐기했다. 의병들은 일본군에 쫓겨 두만강을 넘어 북만주와 시베리아 연해주 등지로 삶의 터전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안창호는 이곳 한인촌을 통일연합기관 설치의 최적지로 삼고자 하였다.

공립협회는 아세아실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그 이익금으로 연해주나 북만주 일대에 토지를 매입하여 근거지를 개척할 계획을 수립하면서 공립협회지방회로 신고려회를 조직했다. 김성무, 이재수, 박영순, 신달윤 등이 신고려회에 가입했다. 공립협회는 안창호의 설계대로 1907년 10월 21일, 아세아실업주식회사를 발기했다. 그리고 1908년 1년 동안 ‘매주 50달러씩 1,000주 모집’이라는 광고를 해서 투자금 1천 6백여 달러를 마련하기로 목표를 수립했다. 회사의 이익금은 연해주와 북만주 일대에 토지를 마련하는 기지개척 투자 자금으로 이용하기로 하고, 투자금을 모으는 대로 토지를 매입하기로 했다. 신고려회는 김성무(1891~1967)를 북만주 밀산현 경영감독관으로 파견하기로 했다. 연해주에는 이강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파견하기로 했다. 본국은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신단체 결성에 대한 국내 여론을 형성해 나갈 필요가 있었다. 이에 적임자는 안창호였다.


1906년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밝아올 무렵, 국내 파견과 전권을 위임받은 안창호는 이강과 임준기 등 최측근과 긴밀하게 밤샘 토론을 벌였다. 이들은 공립협회의 성공적인 발전에 힘을 얻어 더 큰 꿈에 도전하기로 결의하였다. 국권 회복과 신국가 건설 논의를 여러 사람의 공론에 부치기에는 아직 어려움이 있었다.

국권 회복의 청사진이 담긴 비밀문서를 만들고 있던 공립협회 3인방은 토론을 이어 나갔다. 임준기가 기록했다. 안창호와 이강이 토론을 주고받았다.

이강이 먼저 말을 꺼냈다. “무능과 부패와 독점이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 넘겨주게 되었어요. 이 책임은 누가 진다는 말입니까?”

안창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결국,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황제는 2천만 동포를 포기한 셈이오. 우리는 2천만 동포를 새로운 신민으로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가 강한 나라 미국에서 체험하고 있듯이 참된 자유 시민이 되는 길이 국권 회복의 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꼼꼼한 성격의 이강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미국식 공화제를 황제의 애국 충신들이 쉽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입헌군주제라면 몰라도.”

안창호도 이강이 염려한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왔다. 일본처럼 강한 근대국가로 만들자는 원칙에는 선각적 지식인들 대부분 합의할 것이다. 그러나 백성이 주인인 새 나라 미국식 공화제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가 클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왕조 지배에 길든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자신의 권리를 자각해서 일어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 매우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 문명 공화국의 꿈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조선은 새로 설계되어야 합니다. 실패한 관료들에게 나라를 맡겨서는 안 됩니다. 백성이 문명 공화국의 주인이 되어 새로운 대한인으로 각성해야 합니다.” 안창호는 결의를 다지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강이 말을 받았다. “새 백성, 대한인 각성도 중요하지만, 이들을 훈련할 새 단체결성이 먼저요. 신 단체결성으로 황제 옹립 세력을 설득해야만 합니다. 그들은 국권 회복의 새 목표를 입헌군주제로 주장할지 모릅니다. 독립협회 때처럼.”

“음. 그렇소.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일단은 선배들과 공화제에 합의를 이룬 다음 신민 훈련단체를 따로 조직해야 할 것이오.” 안창호가 말했다.

이강이 신중론을 펼쳤다. “단체 우선 결성의 이론적 근거는 양계초 선생의 신국건설로 합시다. 선각자들을 설득하기 위함이요. 비밀결사체로.”

기록하던 임준기가 불쑥 의견을 냈다. “공립협회 국내지부인 셈인데....”

안창호가 이에 대해 의견을 냈다. “국내 단체 이름은 대한신민회가 어떻소. 대한민국으로 가기 위해 신민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 두는 것이오.”

이강이 두 사람의 의견을 종합해서 신중하게 말했다.

“새 백성의 정체성을 대한인으로 호칭하는 것은 좋은데, 신민회는 호놀룰루에서 먼저 사용했던 호칭이라....”

이들은 공립협회 국내지부의 단체 이름을 놓고 많은 토론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대한신민회로 결론을 냈다. 다만 국내 사정에 대한 탐색과 전략적인 접근을 위하여 먼저 북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신고려회를 설치하기로 했다.

기록 담당 임준기가 의견을 종합하여 정리했다. “공화국으로 가기 위해 세계적인 통일연합기관을 설치한다! 북만주와 연해주, 시베리아는 신고려회로! 국내는 대한신민회로!”

이들은 밤을 새워 대한신민회의 취지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통용 장정을 만들었다. 통용 장정이란 회칙을 말한다.

“취지서나 통용 장정은 사실상 포장이오. 우리 계획은 상황대응 전략인 문무쌍전에 있소. 독립협회 해산을 당할 때 뼈저리게 느꼈소.”

안창호가 이 말을 하자, 이강은 목소리를 낮추면서 말을 이었다. “그 전에 어떻게든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 놈들을 처단해야 하는데... 이토란 놈도!”

안창호는 활빈당의 이병확을 빼닮은 이강의 무력투쟁 의지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안창호가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좋소. 을사늑약을 당하고 가만히 있을 백성이 아니란 것을 놈들이 알게 해야 하오. 하지만 큰 위험이 따르는 일이니 공립협회 전체 공론으로 하지 않고 추진하는 것이 어떻겠소? 공립협회 단체는 어떻게든 지켜야 합니다.”

이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해 둔 바가 있다는 듯 말했다.

“무력투쟁에 대해서 도산은 모르는 일로 하세요. 모든 거사 준비는 우리가 합니다. 언제나 말이오. 도산은 지도자요. 대중계몽과 교육에 앞장서야만 합니다. 그러니 몸 상하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단체가 지속, 가능하게 됩니다.”

안창호는 이강의 의중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정래, 자네도 마찬가지요. 일단 각자의 맡은 역할에 충실합시다.”


공립협회는 1907년 1월 초에 안창호와 15세 소년 정영도를 국내로 파견하였다. 정영도의 본명은 정남수로, 안창호가 이명을 지어줬다. 정영도는 안창호를 돕는 비밀수행원으로 활동했다. 안창호가 떠난 후, 이강, 최정익, 정재관 등 공립협회 지도부는 의열 활동에 대한 결의를 다짐하고, 이토 히로부미 처단과 일제에 협력하는 매국적 관료들의 숙청을 결의하였다. 1907년 8월, 이강은 김성무, 오대영, 임치정 등과 미국을 떠나면서 김병록, 차병수, 김정익, 박태은, 이응삼, 이동수, 전태선 등과 을사오적 처단을 위해 비밀조직 숙청단을 조직했다. 여기에 이재명이 가세했다. 이들은 속속 고국으로 들어왔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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